전격 시행에는 합의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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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 시기 놓고 진통/정치적 변수 고려한 듯…신경제정책 변화 예상

알려진 것과는 달리 금융실명제 실시 시기를 결정하는 데는 진통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된 다음날 이를 준비한 실무팀의 한 관계자는 “금융실명제의 원칙과 방향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시기 선택 문제는 대통령 이외에는 누구도 간여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는, 실무팀은 상부에서 결정한 원칙과 방향을 놓고 토론을 벌여 실무 준비만 했을 뿐, 원칙과 방향을 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왜 하필 이 시기에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느냐’는 질문에는 정확해 대답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는 왜 힘들었는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칙과 방향이 빨리 정해지지 않아 실무 준비를 끝낼 수 없었기 때문에 실시할래야 할 수도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만큼 원칙과 방향을 둘러싼 정책 결정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것이다.

 이는 재무부 관료들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원들이 주축이 된 실무팀이 전격 실시 시기를 알게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실무팀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7월 중순. 이때까지만 해도 실무팀의 구성원 11명은 일을 분담해 각자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작업 가운데는 ‘금융실명거래 실시 준비단’이 지난 89년 이미 만들어 놓은 자료를 검토하는 일도 포함돼 있었다. 금융실명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 보였던 재무부 진동수 해외투자 과장이 실무팀에 참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89년 당시 실시준비단의 총괄과장이었다.

7월 중순 이후 본격 가동
 작업을 분담해오던 실무팀은 7월 중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팀워크를 다졌다. 실무팀은 이때부터 관계 법령을 제정하고 실시 당일의 여러 계획들을 수립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실무팀 전원이 어렴풋하게나마 전격 실시 시기가 임박한 것을 짐작한 것은 이때였다고 한다. 실무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준비 과정에서 8월 중 실시할 것이라는 직접적인 언질을 받은 적은 없다”고 밝혔다.

 D데이 결정에 간여할 수 없었던 실무팀은 상부에 ‘적어도 실시하기 이틀 전에는 통보해달라’고 주문해 놓고 있었다. 그래야 준비에 차질이 없을 거란 취지에서였다. 실무팀의 한 관계자는 “내 기억으로는 하루 반나절 전에 통보를 받겠다”고 말했다. 주문이 완전히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셈이다.

 실무팀이 제한적 역할을 했다면, 논란이 됐던 원칙과 방향은 누가 결정했을까. 대통령만의 ‘작품’일까.

 금융실명제의 원칙과 방향이란 게 무엇일까. 우선 실시 방법이 있다. 실시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아예 논외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중에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고 평소 공언했었고, 이 점을 부인하는 측근들은 없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에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비해 완벽한 실무 준비를 해놓으라고 주문한 것은 취임후 두 달이 채 안돼서였다. 이때부터 두 부처의 고위 관리들은 ‘언제 실시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실무 준비는 완벽하게 하고 있다’고 늘 얘기해 왔다.

 과거처럼 국회 입법을 통해서 할 것이냐 아니면 전격 실시할 것이냐가 문제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도 크게 논란거리가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신경제 구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금융 분야에 관여했던 한 경제학자는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 직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라는 정책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고 촌평했다.

 역대 정권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못한 것은 금융실명제 자체의 부작용 때문이라기보다 이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부작용 때문이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긴급명령이 도입 과정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금융실명제란 기본적으로 화폐가 평가절하 정책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만일 이 정책을 실시하는 시기가 미리 알려지면 자국 화폐에 대한 대규모 투매현상이 벌어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이유로 많은 경제관료와 경제학자 사이에서는 전격 실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주식시장에서 자주 금융실명제 전격실시설이 나돌았던 것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재계 불확실성 더욱 느껴
 논란이 됐던 것은 전격 실시 시기였다. 경기 회복 속도가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상황에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경제의 조타수 역할을 자처해온 朴在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말할 것도 없고, 표면상 이번 조처의 주역으로 떠오른 李經植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과 洪在馨 재무부장관을 주축으로 한 신경제팀은 경제 활성화가 최우선의 경제정책 과제라는 데에 일괄된 입장을 보여왔다.

 8월 초부터 신경제팀은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경기를 살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주력해 왔다. 더욱이 정부와 정치권 일각에서는 경기 회복이 더욱 늦어질 경우 새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정책이 중대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경제가 나아진 게 없다면 개혁을 가로막는 일부 기득권 세력이 이를 빌미로 삼으려 들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7월 말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金 悳 안기부장과 전경련 회장단과의 만남이다. 이 자리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정보기관과 기업 간의 협력체제를 구축하자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 회동에서는 경기 회복에 재계가 앞장서주길 바라는 대통령의 바람도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3일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열렸던 ‘민간경제연구소장 초청 경제동향간담회’도 재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자리였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일부 민간경제연구소 소장들은 ‘최근의 경기문제는 고성장과 저성장 사이의 선택의 문제이며, 정부가 고성장 전략을 취한다면 이에 맞는 정책 대응으로 경기회복을 유도해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기업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18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토론회도 경제 활성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차원에서 계획된 것이다. ‘최근 경기 동향과 정책 대응방안’을 다룬 이 토론회에는 3일 회의보다 훨씬 폭 넓은 분야의 경제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11일에 열렸던 대통령 주재 경제장관회의에서는 정부가 기업의 불확실성을 없애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정부가 논란이 될 만한 정책을 발표해 불확실성을 가중시켜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점을 재계에 알리기 위해 신경제팀 전부가 나서야 한다고까지 했다. 이부총리는 대통령 긴급명령 발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입게 될 충격보다는 금융실명제가 언제 실시될지 모르는 데서 오는 불확실성이 컸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는 게 중장기적으로 투자를 촉진케 하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재계의 분위기는 이와 다르다. 공식적으로는 금융실명제 실시를 환영하면서도, 정책에 대한 정부의 공언을 더욱 경계하게 됐다. 정부가 기습적으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듯 언제 어떤 정책을 꺼낼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재계의 입장에서 볼때 불확실성은 더욱 커져버린 셈이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주력해온 박재윤 경제수석은 금융실명제 조기 실시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6월말 언론인들과 접촉한 자리에서 그는 ‘경제가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진입한 후에야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었다. 박수석과 가까운 한 경제학자는 “조기에 실시하겠다는 대통령의 결심을 읽은 후에는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않겠지만, 그 전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기 실시에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시기는 차선, 효과는 최선
 실시 준비를 총지휘한 이부총리의 경우는 금융실명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그가 조기 실시를 진언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는 금융실명제 실시 시기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았다. 금융실명제 조기 실시라는 대통령의 결심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는 오히려 일부 정치권 인사들이나 개혁적 경제 브레인들이 거론된다. 이는 실시 시기를 정하는 데 주로 정치적 변수들이 고려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긴급명령을 발표하고 난 다음날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시기를 선택하는 데 공직자 재산등록과 보궐선거일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실무팀의 한 관계자는 실시 시기를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차선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면서 “효과라는 면에서만 본다면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기침체기에 과감하게 금융실명제를 실시함으로써 정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처럼 개혁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것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한 목표라면 앞으로 경제 정책의 기조가 바뀔 수도 있다. 금융실명제 실시가 신경제정책과 신경제팀의 성격에 변화를 몰고올지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金芳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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