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정치에 종지부 찍으려면
  • 박권상(편집고문) ()
  • 승인 1991.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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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금권정치와 선거풍토에 관하여 샘 제임슨(로스엔젤레스 타임스 특파원으로 일본에서 30년간 근무)씨가 들려준 에피소드 한 토막.

 “지난번 중의원선거 때 동경 북쪽에 있는 群馬를 방문했지. 아시다시피 일본 선거제도는 한 선거구에서 두 사람 내지 다섯 사람을 뽑게 되어 있고 따라서 같은 자민당 후보끼리 싸우게 되어 있지 않아. 군마선거 제3구에 찾아간 것은 누가 이기고 지고를 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현역수상(나카소네)과 전임수상(후쿠다) 이 같은 선거구에서 경합하여 어느 쪽이 일등하느냐에 관심이 있었거든. 네 사람 정원이기 때문에 두 거물이 당선될 것은 뻔한 일이고, 또 한 사람의 자민당 후보와 그리고 사회당 후보가 3, 4등이 될 터이고…”

 그런데 그가 기차정거장에서 택시를 잡아 나카소네 선거사무소에 도착하면서 희한한 일이 생겼다. 무심코 돈지갑을 꺼내 운임을 내려 했다. 그 순간 택시기사가 방긋이 웃으면서 “운임은 필요없습니다”하고 사양하더라는 것. “선거사무소를 찾는 사람의 택시요금이야 당연히 선거사무소에서 물어주니까요”라는 설명이었다. 이른바 일본식 ‘촌지’였다. 얼마 안되는 성의표시라 할까. 나한테 도움주려고 찾아오는 손님인데 내가 거마비쯤 부담하는 것이 예의이고 인정미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사소한 인정미의 표시에서 일본의 금권정치가 시작하는 것인지, 반대로 금권정치의 속성에서 그런 인정미가 나타난 것인지 그 선후관계를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은 별 뜻이 없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일본 사람이 정치인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인식의 문제이다. 즉, 정치가가 되고, 국회원이 된다는 것, 그것은 그에 있어 출세하는 것이고 힘을 갖는 것이고 명예를 얻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무엇인가 크게 득을 보고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표를 모아 국회의원을 시켜준다는데 당연히 반대급부가 있어야겠다는 심리다. “여기서 일본 특유의 머니 폴리틱스가 싹트는 거죠.” 제임슨씨의 관찰이다.

정치란 헌신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
 정치하면 돈이 필요하고 돈없이 정치에 나설 수가 없다. 정치는 돈이다. 정치란 능력있고 경륜을 갖춘 사람이 헌신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 실로 멋있고 신나는 業일텐데, 돈을 만들어 돈으로 표를 모아 공직에 당선되고 돈으로 당파를 움직이고 그럼으로써 권력을 잡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금권정치의 악순환이다. 현대판 ‘매관매직’이라고 매도해도 별로 할 말이 없다. 금권정치의 악덕은 거액의 선거자금을 만들어 뿌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단 벼슬자리에 오른 다음 벼슬자리를 이용해서 본전을 뽑아야 하고 다음 선거에 들 밑천을 조달해야 한다. 정치에 엄청나게 돈이 들 뿐 아니라 정치를 수단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더욱 더 위험한 요소가 있다. 정치인이 돈을 잘 써야만 공직에 당선이 되고 당파세력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곧 ‘돈이 정치를 움직인다’는 결론이다. 돈이 오는 데서 명령이 온다는 것, 그것은 세상만사 너무나 평범한 이치가 아닌가. ‘돈을 위한 돈에 의한 돈의 정치’ 가 민주주의 탈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민주주의의의 타락이다. 아니 종말이다.

 민주주의의 본고장 영국 같은 나라서는 ‘머니 폴리틱스’라는 용어 자체를 들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국회의원은 돈 있고 명망있는 ‘有志紳士’가 지역공동체를 대변하고 봉사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7백년에 걸친 의회의 역사지만 국회위원이 ‘세비’라는 이름의 봉급을 받게 된 것은 1911년부터의 일이고, 지금도 고작 중앙정부 계장과 맞먹는 수준이다.

돈 안쓰는 선거혁명 없이 민주주의는 뿌리내릴 수 없다
 의원으로서 근근이 개인적 지출에 충당할 정도이다. 정치활동에서 돈이나 부가 발생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대신 관혼상제에 화환을 보내고 봉투를 바친다든가 명절에 ‘촌지’를 뿌린다든가 지지자 자녀의 취직을 알선한다든가 하는 서비스 경쟁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선거비용도 법으로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 명년 6월 이전에 있을 총선거에서 슬 수 있는 선거비용은 도시 선거구에서 3천6백48파운드에다가 유권자 1명에 3.3펜스가 추가되고 농촌지역 선거구에서 4.3펜스가 추가된다. 평균 유권자수가 6만명꼴이므로, 도시지역의 경우 5천5백8파운드, 농촌의 경우 6천1백8파운드의 선거 비용이다. 우리 돈으로 환산해서 고작 7백만원 내지 8백만원의 돈이다. 얼마나 싸게 먹히는 선거인가. 돈 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 없고 돈 때문에 선거 망친다는 말 없다. 올바른 사람들이 정치에 뛰어들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여야할 것 없이 그리고 예외없이 법을 지킨다는 데 있다. 몇억, 몇십억을 뿌려야 당선되는 우리의 금권선거, 여기에서 모든 정치의 악이 출발한다. 어떻게 돈없고 점잖은 사람이 선거에 나서겠는가.

 영국식으로 선거풍토를 고치든가. 그것이 어렵다면 1인1구의 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유럽대륙식으로 시도단위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돈을 쓸 필요가 없는 제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 안쓰는 선거혁명 없이 이땅에 민주주의는 뿌리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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