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다 모방 치중” 산업디자인 현주소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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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주간’ 선포해 거듭나기 몸부림

“디자인만이 살 길이다”. 93년을 산업디자인 발전 원년으로 제정한 상공자원부와 한국 산업 디자인 포장개발원(KIDP, 이하 디자인개발원)이 지난 9월1~7일을 ‘디자인 주간’으로 선포하고 제28회 산업디자인 전시회와 우수디자인(GD) 상품 전시회, 산업디자인 개발 성공사계 발표 및 전시회를 개최(9월15일까지, 서울 이화동 KIDP 전시장)하는 한편, 디자이너의 밤에 이어 한·일 산업디자인 세미나를 여는 등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이같은 디자인 잔치는 70년 현 디자인개발원의 전신인 한국 디자인포장 센터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디자인계의 ‘사건’이다. 그러나 이 잔치가 말 그래도 기쁨을 나누는 자리만은 아니다. ‘원년’이나 ‘선포’와 같은 선언적 표현이 상징하듯이, 국내에서 처음 실시하는 디자인 주간의 밑바탕에는 당국·기업·디자인(학)계의 뒤늦은, 그래서 절박하기까지 한 위기 의식이 깔려 있다.

 디자인에 관한 한 한국은 아직까지도 후진국이다. 그동안 주문자 상표 부착생산(OEM) 방식에 매달려온 나머지, 교유 디자인은 개발할 겨를이 없었다. 지난해 국내 수출업체의 디자인 개발 형태를 보면 OEM방식이 50%에 이르고 외국 모방이 16%, 기술도입이 9%인 반면, 국내 업체 자체 개발은 25%밖에 안되는 수준이다(상공부 자료). 지난 89년《타임》이 조사 분석한 결과를 보면, 한국 산업디자인이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대만·싱가포르에 비해 얼마나 처지고 있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부가가치 높이는 경제 전쟁 ‘첨병’
 당국과 기업, 학계가 산업디자인 부흥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 명쾌하다. 디자인개발원 유호민 원장은 9월1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디자인 주간 선포식에서 “상품의 기능에 맞춰 모양이나 색을 덧붙이는 부수적 차원을 넘어서 오늘날의 산업디자인은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경제 전쟁의 첨병”이라고 말했다. 생산이나 과학 기술이 장기적인 시간과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는 데 견줄 때, 산업디자인은 최소 투자로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라는 인식이다.

 디자인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일차적으로 정부 당국에 책임이 있다. 일찍이 디자인포장 센터를 설립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장기적 안목이 없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나마 세워 놓았던 정책마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멀리 보지 않기로는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값싼 노동력에 기대어 OEM방식에만 치중한 것이다.

 디자인개발원 지도개발본부 박한유 본부장은 “디자인포장 센터가 설립된 이후 15년간은 디자인과 포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기간이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으나, 아직도 대부분의 기업은 디자인에 관한 한 암중모색”이라고 국내 산업디자인의 현단계를 파악하고 있다. 디자인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부담감 혹은 몰이해는 여전한 것이다.

싱가포르·대만보다 뒤떨어져
 디자인개발원이 지난 연말 국내 8백18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디자인 예산을 별도로 책정하는 곳은 35%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총 매출액의 0.4% 투자가 고작이었다. 부·과 같은 디자인 전담부서를 갖춘 기업도 38%에 그쳤다. 이같은 수치는 디자인에 대한 경영자들의 소극적 자세를 그대로 반영한다. 조사 대상 가운데 47%가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으나 40%는 비용 부담이 크고 개발 성과가 불확실하다며 디자인을 외면했다. 13%는 아예 관심없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디자인의 경제적 측면을 무시한 채 과학·생산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는 동안, 외국 경쟁국들은 이미 다른 분야, 즉 디자인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은 50년대부터 산업디자인 정책을 세워 통산성에 디자인과를 설치했고(56년), 세계 디자인대회(60년)를 유치했으며, 일본 산업 디자인 진흥회(69년)를 만든 이후 87년에는 ‘90년대를 향한 디자인 정책’을 수립했다. 이어 89년을 ‘디자인의 해’로 선포하고 해마다 10월1일을 디자인의 날로 지정했다. 디자인 설비 및 장기 운전자금 지원을 비롯해 디자인 개선 자금, 디자인 사업 자금 등 산업디자인을 육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싱가포르·대만 역시 한국을 앞질러 가고 있다. 이광요 싱가포르 전 총리는 85년 ‘싱가포르 디자인 센터’를 세우고 디자인 지향 국가를 선언했으며, 대만은 86년에 ‘신상품 개발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88년부터 ‘대만 디자인 향상 5개년 계획’의 실행에 들어가 95년까지 1천2백43억원에 달하는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95년에는 디자인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국제 산업디자인단체 협의회 총회(ICSID)’를 유치할 계획이다.

 국가별 디자인 전략은, 디자인의 세계적 흐름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지구촌 · 지역 디자인 전략. 82쪽 기사참조). 디자인의 개념과 역살이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성을 높이 평가해 오던 유럽 디자인과, 시장성을 추구해오던 미국 산업디자인계의 구별도 이제는 희미해지고 있다. 세계 산업디자인의 본류는 벌써 디자인 최우선 시대로 접어들었다.

 60년대까지 마케팅과 함께 생산기술의 부차적 기능에 머물렀던 디자인은, 그후 80년대까지 마케팅 우선 시대를 거쳐, 90년대부터는 디자인이 제품의 기획 설계 생산 유통 판매 재고관리에 이르는 전과정을 ‘지휘’하는 자리로 올라선 것이다.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회사로 손꼽히는 필립스사의 고위 경영자는 한 인터뷰에서 “제품 성공의 열쇠는 산업디자인이 80%를 차지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제28회 산업디자인 전람회에서 ‘공간 효율성을 위한 세탁 건조시스템’을 윤창수씨와 함께 출품해 대통령상을 수상한 심규승씨(금성사 디자인종합연구소 선임연구원)는 “산업디자인의 흐름이 디자인의 스타일 변화만이 아니라 마케팅은 물론, 나아가 새로운 미의식과 생활문화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디자인 주간에 열린 각종 디자인전에서 입상한 금성사·삼성전자·대우전자와 같은 가전업체를 비롯해 자동차·섬유·화장품 등 17개 대기업체는 디자인 전문 조직을 운영하면서, 세계적인 디자인 전쟁에 나름대로 대처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은, 통계가 말해주듯 아직 디자인 개발은 통한 경쟁력 강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번에 전시된 상품들은 보면, 제품 디자인 전문회사의 기량을 높이 평가해 자체 디자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중소기업체들에게 청신호를 비치고 있다. 지난해 국내 처음으로 제품 디자인 수출의 물꼬를 튼 제품 디자인 전문회사 ‘212디자인’이 ‘가정용 컴팩 정수기’와 ‘애완동물 자동 먹이 공급기’를 출품해 입상한 것이다.

장기 정책, 일관되게 추진해야
 일본의 경우 디자인 전문 회사가 4백여 곳인 데 비해, 국내에는 비록 25개 업체밖에 안되지만, 정부 당국의 산업디자인 진흥 대책이 차근차근 실효를 거두고, 아울러 기업주가 디자인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면, 중소기업들도 제품 디자인 전문 회사와 손잡고 수출시장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상공부가 신경제 도약을 위해 마련한 산업디자인 진흥 대책의 골자는, 먼저 산업디자인을 생각기술과 함께 제조업 경쟁력 강화의 핵심 요소로 간주한 것이다. 특히 경공업 분야의 디자인 고급화 전략은 제품 경쟁력을 높이는데 있어 관건이라는 시각이다.

 이같은 대전제 아래 산업디자인 발전 5계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가전제품·사무용기기·유모차 등 50개 수출유망 주요대상 품목을 대상으로 94년에 1천여 개발 건을 지원하고, 98년께에는 7천5백개 품목을 지원하게 된다. 아울러 디자인 전문 인력 및 전문회사를 육성하고, 국제 산업디자인 단체 협의회(ICSID) 총회를 유치하는 등 국제 협력을 꾀하고, 산업디자인 포장기금을 97년까지 5백억원 수준으로 조성하는 등 디자인개발원의 위상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그러나 당국이 청사진을 제시했음에도 과연 산업디자인이 한단계 발전할 것인가 못미더워하는 시각도 있다. 디자인 주간 선포식을 전후로 전문가들이 내놓은 제안들을 종합해 보면, 미적 가치와 사용 가치를 극대화 하는 한편으로 제품의 기능을 단순화·인간화해야 하며, 동시에 환경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이것이 단기적인 전략이라면, 장기적으로는 일관적이고 지속적인 디자인 정책이 실현되어야 한다. 정부 기구에 디자인 전담 부서를 설치하고, 대학교에 디자인학부를 개설하는 한편 산업디자인 정보센터를 운영하는 일도 장기 대책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李文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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