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종’은 울려야 한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6.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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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상의 사건파일] ‘KBS <추적 60분> 방영 불가’ 파문을 보며

 
 “15년간 끊었던 담배에 다시 손댔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만난 KBS 정연주 사장은 기자에게 마음고생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했다. 걸핏하면 국회에서 물고 늘어지는 야당의 사퇴 공세에 KBS 노조까지 퇴진운동을 펴던 때라 노심초사하는 그의 속이 오죽할까 싶었다.
 오는 6월30일로 임기 만료를 앞둔 KBS 정연주 사장에게는 바람 잘 날이 없다. 이번에는 노조의 설문조사 결과와 줄기세포 연구 특허 문제를 둘러싼 <추적 60분> 방영 불가 파문이 사장 연임 의욕을 가진 그의 발목을 잡았다. 4월6일 노조가 KBS 임직원 4천여 명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무려 82.2%가 그의 연임에 반대했고, 종합 평가 점수도 10점 만점에 4.12점으로 나온 것이다.

정연주 사장에게 또다른 불똥은 <추적 60분> 불방 사태에서 튀었다. 황우석 줄기세포 연구 특허 도용 의혹을 추적한 이 프로그램에 대해 정사장을 포함한 경영진이 방영 불가 결정을 내리자 담당 문형렬 PD가 이에 반발해 테이프를 들고 나가 인터넷 동영상으로 띄운 것이다. KBS 경영진은 저작권을 내세우며 문PD를 상대로 법적 대응 방침을 밝혔지만 창사 이래 초유의 사태는 정연주 사장에게 관리 조정 능력 부재라는 부메랑을 안겨주었다.
<추적 60분>은 MBC <PD수첩>과 비견되는 KBS의 간판 탐사 고발 프로그램이다. 경험과 연조가 있는 PD들이 배치되어 그동안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심도 있게 조명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 경력 15년차인 문형렬 PD는 4개월에 걸쳐 황우석 파문의 뒤안에서 전개된 미국 섀튼 교수의 특허 도용 의혹을 추적했다고 한다.

정연주 사장은 약속을 지켰는가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쓴 기사나 제작한 프로그램에 남다른 애착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남들이 볼 수 있는 함정을 자기만 못 본 채 집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PD가 제작한 황우석 특허 관련 프로그램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던 만큼 수차례에 걸쳐 동료 선후배 PD들이 둘러앉아 시사회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지적된 미흡한 대목은 두 차례나 보완 취재를 거친 후 4월3일 최종적으로 <추적 60분>팀 제작진 시사회를 가졌다. 그 결과 ‘이만하면 방영해도 되겠다. 마지막으로 책임피디(CP)와 프로그램을 만든 문형렬 피디가 조율해서 방영하도록 하자’는 결론에 도달했고 한다.
 여기까지는 <추적 60분> 제작진 내부의 자율적 의사결정 시스템이 비교적 잘 작동했다. 그러나 제작진의 결정은 이날 밤 돌연 ‘윗선’에 의해 뒤집혔다. 경영진에서 제작진 회의 결과를 무시하고 법적 시비 소지 및 사실 확인 불충분성 등을 이유로 방영 중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문PD에게는 모든 테이프를 반납하라고 지시했다. 부당하다고 여긴 문PD는 테이프를 들고 나간 뒤 인터넷 언론에 공개해버렸다.
정사장은 그동안 기자나 PD들에게 법적 소송을 무서워하지 말고 성역에 도전하라고 권장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처리한 과정을 보면 정사장이 자신의 약속을 지켰는지 의문스럽다.

기자나 PD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관찰자 처지에서 사실과 사실에 가까운 ‘팩트’를 찾아나가는 직업이다. 문PD는 4개월간 특허의 진실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토론하고 자료를 찾고 취재하며 확인 과정을 거쳐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PD가 취재한 것이 사실인 이상 보도를 내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설령 최종 확인 결과 진실이 아니라고 나올지라도 주제가 공익적 사안으로 합리적 의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고 취재 과정과 절차에서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다면 담당 PD로서는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국내 언론 관련 법제에서도 이 기준은 무척 중시된다.

지난해 10월 MBC <PD수첩>이 난자 윤리 문제를 주제로 황우석 파문을 추적 취재했을 때에도 이를 반대하는 안팎의 압력이 거셌다. 당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보도의 자유를 침해하는 초유의 사태가 광풍처럼 전개되었다. 취재 윤리 및 국익, 사회적 혼란 따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유가 방영 반대 논거로 등장했다. 홍역을 톡톡히 치르면서도 <PD수첩>은 결국 방영을 했고, 그 결과 줄기세포 논문 조작 진실의 문을 여는 데 공헌했다.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추적 60분>도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정사장이 보기에 부족한 면이 있다면 좀더 보완해 내보내면 될 일이다. 민주적 방송에서 일선 제작진의 자율성에 기초한 의사 결정과 합리적인 문제 해결 능력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할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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