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그러나 그것만은…”
  • 김동선 (편집국장 대우) ()
  • 승인 199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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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신·무능의 낙인 찍힌 인물을 과감하게 교체할 때 비로소 人事萬事의 원리는 제대로 지켜졌다 할 것이다.”

 새삼 김영삼 대통령의 소신 중의 하나인 ‘人事가 萬事’라는 말이 되새겨진다. 인사란 발탁뿐만 아니라 관리·교체 문제까지 포함하는 것인데, 최근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전후에 나타난 정부내 일련의 형태는 ‘人事萬事’ 원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박재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금융실명제 실시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명색이 대통령의 경제 수석 참모가 ‘경제혁명’이라고까지 평가받는 실명제 실시를 몰랐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부 고위 소식통에 따르면 그 경위는 이렇다.

 대통령 특명으로 실무반이 보안 속에서 실명제 실시 준비 작업을 한참 마무리할 무렵인 지난 8월초, 박재윤 수석은 청남대에서 휴가중인 김영삼 대통령을 찾아가 면담했다. 그 자리에서의 대화는 이렇게 진행됐다.

박수석 :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대통령 : 뭡니까?

박수석 : 실명제에 관한 것입니다.

대통령 : ….

 이 순간 김대통령은 실명제 실시 비밀이 박수석에게 샜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수석은 그 비밀을 알지 못한 채 평소 소신을 피력했다. “여러 상황을 참작컨대, 실명제는 내년에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해 이제부터 준비를 하겠습니다.” 필자는 박수석의 이 의견에 대한 대통령의 반응을 듣지 못했다. 아마도 김대통령은 보안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참모의 무소신은 일을 그르친다
 이경식 부총리는 실명제 긴급명령 내용을 조정할 때 소신을 관철하지 못했다. 이부총리는 긴급명령 최종 결정 순간에 실명일 경우 자금출처 조사 면제 상한선을 1억원으로 해야 된다고 건의했다가 대통령의 ‘안된다’는 불호령 한마디에 더이상 주장하지 못했다. 현재 상한선 5천만원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경제 관료들의 일반적 평가이다. 한 각료는 사석에서 필자에게 “이부총리는 1억원 주장을 굽히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의 속뜻은 이부총리의 무소신을 비꼬는 것이었다.

 경부고속전철이 프랑스 떼제베(TGV)로 결정된 후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석상에서 호남고속전철도 만들겠다고 밝혔고, 교통부장관은 다음날 부랴부랴 출입기자실에 나타나 호남고속전철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야당은 즉각 ‘실현성 없는 허풍’이라고 공격했는데, 이부총리의 무소신을 비판했던 그 각료는 필자에게 “호남고속전철 건에 대해 누군가가 대통령의 그 말씀을 막았어야 했다”라고 실토했다.

 대한약사회와 한의사협회가 각각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마라톤 회의를 하고 있던 지난 토요일(9월4일) 보사 부장·차관은 일찍 퇴근해버렸고, 주무 국장까지 청사를 비웠다고 보도됐다. 무사안일의 극치랄까. 보사부 책임자들에게서는 국록을 먹는 자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무분별한 인사, 폐해는 국민에게
 ‘天工人代’라는 말이 있다. 왕조시대의 용어인데, 풀이하자면 ‘하늘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사람이 대행하고 있으므로 함부로 관직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국가에서도 유효하다. 아니, 국민이 주인이기 때문에 관직을 아무에게나 주어서 안되는 원리는 더욱 지켜져야 한다.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을 무분별하게 기용하면 결국 그 폐해는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그래서 인사가 만사라는 진리가 나온 것이고, 인사 문제는 부적격한 인물을 과감하게 교체해야 된다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의 중대 경제 정책인 실명제 실시 과정 때 소외되었던 박재윤 경제수석은 아무래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어색하다. 경제 참모 역할을 못했다면 훌훌 털고 떠나는 자세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이경식 부총리도 소신을 관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소신을 끝까지 주장했다면 대통령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현재의 실명제 ‘혼선’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교통부장관이나 보사부장관도 마찬가지이다. 소신 문제로 잘못돼 보았자 그만두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왕조시대 같으면 반대하다가 “삶아라!”하면 목숨을 잃게 되지만, 대명천지 문민 시대에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해서 목숨을 잃는 일은 없다. 소신을 지키다가 훌훌 털고 평민으로 돌아가는 자세를 보이면 그것이 오히려 관료 조직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다.

 대통령이 신이 아닌 이상 전지전능할 수 없다. 그래서 보좌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더 클 때도 있는 것이다. 그 역할 중의 하나는 “각하,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이다. 또한 지도자는 諫言·直言·苦言을 곁에 두는 아량을 갖추어야 한다.
 개혁 성공을 위해서 무소신·무능의 낙인이 찍힌 인물은 교체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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