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대접 여론에 들끓는 '대구 정서'
  • 대구.서명숙 기자 ()
  • 승인 1993.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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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K 거물 잇단 수난, 각종 공약도 수정.백지화...소외감 증폭, 지역 신당설 '고개'



 최근 정가에서는 대구 동구을 보궐 선거 이후 한동안 사그러들었던 '대구 정서'가 다시 화두로 거론되고 있다.

 대구 정서는 공직자 재산 공개의 여파로 청와대의 朴魯榮 치안비서관, 鄭玉淳 여성담당비서관이 물러난 데 이어 검찰내 대구.경북 세력을 대표하는 朴鍾喆 검찰총장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표를 제출하는 상황이 빚어지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들 모두가 공교롭게도 대구.경북 출신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정가 일각에서는 '지난 번에 이어 2차 재산 공개 파문도 결국은 TK의 수난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오갔다.

 대구 정서는 민자당의 문제 의원 처리 과정에서 또다시 거론됐다. 1차 재산 공개 때 25억7천만원이던 것이 2차에는 93억7천여만원으로 크게 늘어난 鄭鎬溶 의원은 '공직을 이용한 축재'와 '축소 신고'에 대한 의혹 때문에 당초 당원권 정치 대상자로 검토됐다. 군과 공직으로만 채워진 경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이라는 세간의 의혹과, 대구지역 보궐선거를 또 치러서 좋을 게 없다는 현실의 절충안이었다.

 정의원은 金溶泰 의원 등 동료 의원들까지 총동원하는 결사적인 구명 운동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막바지에는 정의원 자신이 金鍾泌 대표최고위원과 직접 대면해 대구 동을 보궐선거의 패배를 상기시키는 한편, 박치안감과 박검찰총장 경질에 따른 대구 정서를 강조했다. 결국 정의원 징계는 당초 방침에서 훨씬 후퇴한 '내부 경고'선으로 마무리됐다. 그런데도 민자당에서 재산과 관련해 중징계를 받은 3명 가운데 2명이 대구.경북 출신으로 기록됐다.

'고속전철 변경'소식에 시민 반발 거세
 요즈음 이 지역 민자당 의원 사이에서는 '보선에서 형성된 대구 정서가 날이 갈수록 더 자리를 잡아간다. 어렴풋하던 정서가 아예 형체화하고 있다. 이런 CNT;로 가다가는 다음 총선에서는 다 떨어진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심지어 정가 일각에서는 다음 총선에서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충청도와 강원도를 지역 기반으로 묶는 '신당'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는 성급한 관측마저 나돈다. 이러한 '신당설'의 밑바탕에는 '민자당 간판으로는 더 이상 이 지역 유권자를 설득하기 힘들 만큼 대구 정서가 악화돼 있다'는 또 다른 가정이 깔려 있다.

 과연 보궐선거 이후 대구 정서는 악화되고 있는가, 대구 지역 인사들은 한결같이 현정권을 바라보는 대구의 민심이 보궐선거 당시보다 더 악화됐다는 분석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부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거취 때문이 아니며, 경제적 박탈감과 소외감이 그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 지역의 한 중견 언론인은 "중앙 권력에 진출한 일부 대구.경북 기득권 세력의 몰락이 대구정서를 좌우하는 건 아니다. 대구 시민 모두가 기득권 세력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며 "표적.보보깅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이 지역 인사들이 주요 타깃으로 두드러지는 사정 결과에 일말의 씁쓸함과 허전함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구 시민들의 정서를 좌우하는 것은 그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다"라고 말한다.

 대구 상공회의소의 한 관계자는 '더 현실적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지하철 자금축소, 국제공항계획 전면 백지화, 삼성 상용차 제2공장 부지 축소, 고속전철 설계 변경등 가뜩이나 휘청거리는 이 지역 경제에 타격을 가하는 정부 방침들이 연이어 발표되거나 확정됐다. 정치적 소외감에 이어 경제적 타격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대구 정서가 불만 쪽으로 중복되고 있다."

 고속전철 대구 구간에 대한 건설 방식을 변경한 일은 요즘 들어 대구 시민들을 가장 자극한 사인이다.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은 89년에 입안한 경부고속전철 건설안을 일부 선질하면서 대구 구간의 건설 방식을 당초 계획했던 '지상 건설'방식으로 바꾸기로 확정하고 그 결과를 대구시에 통보했다. 대구시는 보궐선거가 한창인 무렵 이어서 이 사안이 선거에 미칠 파장을 감안해 쉬쉬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건설 방식이 바뀜에 따라 12.6km의 구간이 도심을 지나게 됐고, 대구 시민회관 등 공공 건물과 학교 주택이 헐리게 됐으며 기존 도시계획까지 대폭 수정 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됐다. 건설공단측은 서울 .대구 등 4개 구간을 지상으로 건설하게 되면 1조여 원의 공사비(대구 구간만 2천20억원)를 절감할 수 있으므로 건설 방식 변경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대구시민.시의회.사회단체들은 '범시민 대책위원회''지상화 반대 시민단체협의회'를 구성해 1백만명 서명 운동에 나서는 등 거센 반발을 보이고 있다. 이 지역 언론에서도 연일이 문제를 1면 머리 기사로 다루고 있어 파장은 더욱 커질 기세다.

 이들 단체들은 "기존 경부선 철도가 도심을 관통하고 있어 대구 발전의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여기에 새로운 고속전철 선로가 깔리고 방음벽이 설치되면 도심의 남북분단 현상이 더욱 심해진다. 그로 인한 도심의 소음.공해 문제 역시 심각해질 것이다. 2천억을 절감하려다 장기적으로는 2조원이 넘는 피해를 낳을 수도 있다"면서 변경안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대구시 의회도 이미 '반대 결의안'을 토오가시키고 강력 저지 방침을 굳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 金漢圭  시지부위원장을 비롯해 김용태.정호용 의원 등 민자당 대구 지역 지구당위원장들은 지난 18일 서울 팔레서 호텔에서 행정부의 李經植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과 李啓謚 교통부장관을 초청해 모임을 갖고 대책을 숙의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측은 지역 형평성 논란을 아예 원천 봉쇄한다는 취지아래 고속전철 전구간의 지상 건설안을 확정했지만, 이로써 대구 지역의 반발이 가라앉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지역 감정으로 굳어질 수도
 삼성중공업의 상용차 제2공장 대구 유치 문제도 지역 정서를 악화시킨 한 용인으로 꼽힌다. 대구시는 대구 동을 보궐선거 기간인 지난달 7일 '삼성중공업 상용차 제2공장을 대구 성서공단에 유치키로 한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고, 민자당의 魯東一 후보는 정당연설회를 통해 "내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선거전에 최대한 활용했다.

 그러나 보궐선거 이후 삼성중공업의 상용차 제2공장 계획이 당초의 50만~60만평 규모에서 30만평 규모로 축소 조정되는 것으로 발곃지면서 지역 주민을 실망시켰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 공장의 경우는 삼성측의 진출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인 데다, 확정된다 하더라도 대구보다 경쟁력이 높은 부산.호남 지역이 경쟁 지역으로 떠올라 성사 여부가 전적으로 불투명하다고 알려진다.

 경위야 어찌 됐건 대형 공약 사업의 잇따른 취소와 변경은 사양 산업인 섬유산업에 의존한 채 전국 최고의 부도율에 시달려온 대구의 민심을 악화시킨 용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지역 경제인들은 추석을 전후해 이 지역 영세업체의 부도율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피부로 느껴지는 경제난에 따른 민심 이탈 현상'이 가속화할 것으로 진단한다. 최근 이 지역 출신 민자당 의원들이 부쩍 목소리를 높이고 나선 것도 '지역 민원 해결'과 '위상 찾기'라는 다목적 정치 효과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정작 관심을 써야 할 대목은 '한 시대의 정치사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지역감정'이 또다른 형태로 고착되지 않도록 그 응어리를 빨리 풀어내는 일이다. "역대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했지만 이 지역이 덕본 것은 하나도 없다. 있다면 자부심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자부심마저 사라져 서운한데, 손해까지 보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인데도 한마디로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낀다."

 새로운 지역 감정의 출현을 예고하는 평범한 대구 시민의 의식을 결코 예사롭게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경제는 경제 논리로, 정치는 정치 논리로 분리해서 접근하되, 정당한 정책 결정이라면 당당하고 차분하게 설득하는 정치권의 노력이 아쉬운 상황이다.
대구.徐明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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