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차세대 판도’
  • 서명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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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망한 정치인. 이 질문은 정치인들에게는 매우 민감하고도 매혹적인 것이다. ‘미래를 향해 투자하는 직업’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올 여론조사에서 전문가 집단은 ‘가장 유망한 정치인’으로 ①金德龍 ②崔炯佑 ③朴燦鐘 ④金潤煥 ⑤李富榮 ⑥金大中 ⑦李基澤 ⑧朴寬用 ⑨金鐘泌 ⑩李 哲 의원을 지목했다. 비슷한 유형의 질문을 던진 (단 1盧3金은 제외) 지난해 조사에서 전문가 집단은 ①박찬종 ②李鍾贊 ③김윤환 ④이부영 ⑤이 철 ⑥朴哲彦 ⑦朴泰俊 ⑧이기택 ⑨金相賢 ⑩金東吉 의원 순으로 그 장래성을 내다보았다. 이 결과에서 시대의 흐름과 정치권 내의 힘의 변화가 극명하게 투영됐음을 알 수 있다.

전문가 집단 1천명 중 31.1%가 ‘金永三 정부 아래서 가장 크게 부각될 유망한 정치인’으로 金德龍 정무제1장관을 지목했다. 지난해 김장관을 지목한 전문가는 1.2%(순위는 11위)에 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조사에서는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崔炯佑 의원이 2위로 뛰어올랐다.

반면 지난해까지만 해도 유망한 차세대 정치인으로 꼽혔던 이종찬 새한국당 대표, 박철언 의원,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 김동길 국민당 대표의 경우 올해에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대통령선거 결과와 김영삼 정부 등장이라는 변화가 개인의 정치적 미래와 가능성을 활짝 열었는가 하면, 그 입지를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 셈이다. 이 결과가 암시하고 있는 정치적 맥락과 그 배경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떠오른 실세 ‘좌덕룡 우형우’
우선 1위로 꼽힌 김장관의 경우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이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밖의 개인적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 만들기’에 21년을 바친 김장관과 김대통령의 끈끈한 신뢰 관계, 개혁 흐름과 부합되는 6·3세대의 대표 주자라는 점, 민주계에서는 보기 드문 참모형 측근이라는 이미지들이 그것이다.

미래를 겨냥하는 많은 정치인들의 덫으로, 또는 정치적 한계로 작용하는 지역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점도 김장관의 강점으로 지적된다. 김장관은 호남 출신이면서도 영남 출신인 김대통령을 줄곧 따라다녔고, 학연은 서울·경기 쪽에서 형성했다. 특정 지역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 여러 지역에 연고권을 갖고 있는 셈이다. 민자당의 한 현역 의원은 “차기 지도자는 지역성 극복과 세대교체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만 한다. 김장관은 이런 점에서 매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나이나 분야에 관계없이 고르게 언급된 가운데서도 특히 ‘현실 문제에 민감한’ 정계(46%)와 언론계(39%)가 그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 것도 이런 현실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김장관의 ‘정치적 장래’와 ‘유망성’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다. 우선 다선 의원들이 포진한 정치권에서 재선밖에 안되는 의회 정치 경력, 자파인 민주계에서도 그를 바라보는 시각이 엇갈리는 점 등이 거론된다. 민주계의 정책 브레인이라는 세평에 대해서도 민정계 의원들 가운데는 ‘20여 년을 비서직에만 머물렀던 DR가 과연 체계적인 지식과 행정 능력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정계와 언론계·학계의 후한 평점과는 달리 대중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은 점도 김장관의 취약점으로 꼽힌다.

무엇보다도 김장관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변수는 주변의 견제와 노림수다. ‘초반에 돌출 하는 2인자치고 성공한 사람이 없다’는 쓰라린 금언은 한국 정치사가 만든 한 경험칙이다. 그런 점에서 김장관은 가장 큰 가능성만큼이나 불안한 이중적 상황에 처해 있다.

김장관 자신도 이 점을 십분 의식하고 있다. 김장관은 정권 출범기에 한 정책 토론회에서 ‘새 정치집단 출현 가능성’을 시사한 발언이 ‘정치권 물갈이’ ‘정계개편론’으로 비화됐던 악몽을 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뒤 김장관의 행보는 눈에 띄게 둔해졌고, 행동 반경도 상당히 좁아졌다. 언론과의 접촉도 애써 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김장관실에서는 “유망하다는 평가가 오히려 부담스럽다”면서, 인터뷰 요청에 대해 “대통령의 측근이 개인적인 일로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극히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돌출 사건으로 민자당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던 최형우 의원은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으로 지목된 데 이어 ‘가장 유망한 정치인’으로 두번째 많은 응답을 얻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정계에서 최의원의 유망성을 집중적으로 거론한 사실(40%)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최의원을 향한 김대통령의 여전한 신임, 상도동계의 실질적인 맏형으로서 민주계 내에서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의원 스스로도 중진 역할을 자임하며 중진 협의체를 제안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민추협 관련 인사들과 민주 산악회 관계자들을 활발하게 접촉하는 등  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 그는 이를 “지난날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회포를 나누고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는 개인적 차원의 만남일 뿐이다”라고 설명하지만, 정치권 물갈이에 대비한 세 확대 작업이라는 게 정가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최의원 주변에서는 최의원 특유의 보스 기질과 김대통령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민주화투쟁경력, 여야를 통틀어 보기 드문 5선 의원이라는 의회 경력을 들어 ‘최의원의 장래’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당직에서 물러난 후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경제 과외 공부를 시작한 것도 ‘미래를 향한 나름대로의 준비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의 단기 목표는 차기 당 대표에 맞춰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밖에 虛舟 김윤환 의원은 민정계 출신 정치인이 대부분 몰락한 가운데서도 지난해 3위에 이어 상위권(4위)에 머물러 ‘빈배의 저력’을 과시했다. 김영삼 대통령 ‘킹 메이커’ 노릇을 했던 김의원은 대구·경북 출신이라는 제약을 갖고 있음에도 대세와 시대적 흐름을 미리 짚고 그 흐름을 끌고나가는 정치적 안목과, 적을 만들지 않는 특유의 처신술 때문에 여전히 정치적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야권의 경우에도 주류의 떠오름과 비주류의 가라앉음이 엿보인다. 이기택 대표가 다소 상승세를 보인 반면 金相賢 이 철 의원은 순위가 밀려나가나 아예 거론되지 않았다.
박찬종 신정당 대표는 지난해 1위에서 3위로 내려앉았지만, 야권 정치인 가운데 ‘가장 유망한 정치인’으로 꼽혔다. 박대표의 경우 특히 20대와 사회단체 인사들 사이에서 1위로 지목돼, 젊은층에게는 ‘깨끗하고 참신한 이미지’가 주효했음을 보여 주었다. ‘당선자를 빼놓고는 지난 대통령성거에서 가장 이익을 본 정치인’이라는 세평을 확인한 셈이다. 민주당 개혁 그룹의 대표 주자인 이부영 최고위원은 지난해에 이어 상위권에 언급됨으로써 차세대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는 ‘현재의 영향력’에서는 2위를 기록했지만 미래의 가능성에서는 6위에 그쳤다. 더욱이 정계에서는 8위(8%)에 머물렀다. 이 결과가 함축하는 의미를 정확히 가려내기는 어렵지만, 그의 계속적인 정계은퇴 발언이 정계에서 점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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