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부 ‘힘’은 경제부처
  • 조용준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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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경제기획원은 어너러블(honorable), 상공자원부는 컬러풀(colorful), 재무부는 파워풀(powerful)하다고 한다. 경제기획원은 예산업무를 제외하면 별로 실권이 없지만 경제 부처를 총괄하는 부서로서의 명예를 누리고, 상공자원부는 재계와 산업계 여기저기에 화려하게 생색낼 수 있고, 재무부는 실질적인 권한을 틀어쥐고 있어 실용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경제기획원 관리는 경제 정책을 조정하면서 큰소리를 칠 수 있고, 상공자원부 관리는 여러 선심성 약속을 할 수 있지만 돈줄을 쥐고 있는 재무부 관리가 이를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언론에서 처음으로 행정부내 각 부처의 실무 국 ·실장들이 지닌 영향력의 정도를 여론조사를 통해 알아 보았다. 이는 한국의 행정부 관료집단 가운데서 과연 어떤 사람들이 권한을 가지고 있고, 관료 집단을 어떤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지 알아볼 수 있는 최초의 조사이다.

그 결과는 단연 경제를 다루는 부처의 실 ·국장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행정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부처의 실무 국 ·실장 자리를 3개만 든다면?’이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가장 많은 수(39.8%)가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자리를 꼽았다(《시사저널》 207호 66쪽 李錫采 예산실장 인터뷰 참조). 여기에는 이번 여론조사 표본인 경제계 ·학계 ·정계 ·관계 ·사회단체 전문가들이 모두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언론계가 재무부 이재국장(24%)이 경제기획원 예산실장(21%)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그러나 관계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행정부 관료들은 다른 집단보다 월등하게 높게 (64.1%) 예산실장이 제일 막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계는 38.9%가, 경제계는 13.9%가, 정계는 28%가, 사회단체는 26%가 예산실장을 꼽았다. 경제계가 다른 집단에 비해 훨씬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각 부처 자리의 영향력 정도를 보면 ②재무부 이재국장 ③재무부 세제실장 ④청와대 비서실장 ⑤내무부 지방행정국장 ⑥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 ⑦상공자원부 상역국장 ⑧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 ⑨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⑩감사원 감사원장 ·총무처 인사국장의 순서로 나타났다. 청와대 비서실장이 네번째에, 감사원 감사원장이 열번째에 오른 것은 응답자들이 질문의 취지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대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사원장과 대통령 비서실장은 행정부 각 부처의 국 ·실장과 동등한 잣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언론계, 재무부 이재국장을 1위로 지목
다만 과거 권위주의 체재 아래서는 청와대 비서실장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막강한 힘을 발휘했으나, 문민 정부 출범과 함께 사회 각 분야에서 문민화가 진행되고 그로 인해 인식의 변화도 생기면서 어느 정도 이런 기류를 반영하고 있다는 한 준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사원 감사원장 자리 역시 김영삼 정부의 출범과 함께 헌법상에 보장된 원래의 위상과 권위를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사원장의 지위는 앞으로도 계속 상당한 권위를 갖게 될 것으로 보이나 영향력과는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할 듯하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장과 재무부 이재국장을 제외한 나머지 부처는 각 자리 사이의 편차가 그리 크지 않아 순위상의 의미는 크게 평가할 수 없을 듯하다. 세번째 순위까지는 연령별로 보아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 참고로 행정 관료들이 평가한 순위를 보면 ①경제기획원 예산실장(64.1%) ②재무부 이재국장(32.6%) ③재무부 세제실장(13%) ④내무부 지방행정국장(8%) ⑤상공자원부 상역국장 ·총무처 인사국장(각각 5.3%) 순이다.

재무부 이재국장이 두번째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데는 언론계를 제외한 관계 ·학계(22.1%) ·경제계(12.9%) ·정계(12%) ·사회단체(9%)가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정계에서는 이재국장과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의 영향력이 같다고 평가했다. 언론계는 다른 집단과 달리 1,2위 순위가 바뀌어 예산실장을 두번째(21%)로 지목했다.

이재국은 ‘재무부의 꽃’으로 불리는 핵심 부서이다. 그만큼 이재국의 독주도 정평이 나 있다. 어떤 해에는 행정고시 수석에서부터 8등까지가 모두 재무부에 가기를 희망해 공무원 사회에서 화제가 된 적도 있었던 만큼 이재국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국은 △금융정책과 △재정융자과 △산업금융과 △은행과 △중소금융과 등 5개 부서에, 인원은 60명이다. 한때 이재국장 자리는 ㄱ고 출신이 아니면 입성을 불허할 정도로 배타적이었으나 지난 4월 부산고 출신이 국장으로 취임해 정권 교체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20쪽 인터뷰 참조).

재무부는 재무부 관료 출신이 만든 ‘재우회’라는 친목단체를 통해 증권 ·금융 ·보험계를 지배하고 있어 ‘모피아’(재무부의 영어 약자 MOF와 마피아를 합쳐 만든 말)라는 말을 듣고 있는데, 이재국은 역대 이재국장 출신만의 ‘이재회’를 따로 가지고 있다. 명단을 보면 재무부장관 출신에 金元基(쌍용그룹 고문), 金龍煥(무소속 의원), 鄭永儀(담배인삼공사 이사장), 李龍萬씨 등이 있다. 또 다른 부처 장관으로 나간 사람에는 張德鎭(대륙연구소 회장) 朴鳳煥(현 손해보험협회장) 姜賢旭(현 민자당 위원장) 씨 등이 있다.

세번째로 영향력을 가진 자리부터는 표본집단의 성격에 따라 심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재무부 세제실장이 세번째이나 경제계는 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5.9%)을 더 높게 매겼다. 사회단체는 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5%)과 감사원장을 동등하게 평가했다. 또 학계는 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과 내무부 지방행정국장, 상공자원부 상역국장을 같은 순위(5.3%)로 매겼다.

다섯번째 순위가 매겨진 내무부 지방행정국장은 비 경제부처 가운데 가장 높은 영향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내무부 지방행정국장이 이렇듯 높은 순위에 올라 있는 것은 그만큼 한국의 지방자치제가 아직도 제자리를 찾고 있지 못하다는 명확한 반증이기도 하다. 지방행정국장은 학계가 세번째, 언론계와 사회단체가 각기 다섯번째라고 평가했다.

10위권 직전에 위치한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총무처 인사국장은 순위에 관계 없이 역시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리로 볼 수 있다. 정계의 경우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두번째(12%)로 높게 평가한 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이는 행정조정실장이 행정부내 모든 부처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기 때문에 국회의원의 각종 민원사항이나 업무 협조와 연결되는 일이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10위권 밖으로는 검찰청 검찰총장, 국세청 국세청장, 상공자원부 산업정책국장, 법무부 검찰국장, 국세청 조사국장 등이 언급되었다.
 
5개 경제 부처 따로 조사
《시사저널》이 이번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또 한가지 특색 있는 사실은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자원부 건설부 농수산부 등 5개 경제 부처만을 대상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따로 질문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질서가 국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변모하고 있고, 현재 한국 경제가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어느 때보다도 경제 부처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순위를 보면 ①경제기획원 예산실장 ②재무부 이재국장 ③상공자원부 상역국장 ④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 ⑤재무부 세제실장 ⑥경제기획원 경제기획실장 ⑦상공자원부 산업정책국장 ⑧재무부 실명제 총괄팀 ⑨상공자원부 기획관리실장 ⑩상공자원부 통상진흥국장의 순서이다.

이를 행정 관료 표본이 꼽은 순위로 따로 보면 ①경제기획원 예산실장(49.5%) ②재무부 이재국장(34.2%) ③상공자원부 상역국장(16.3%%) ④상공자원부 상역정책국장(6%) ⑤재무부 세제실장(3.3%)의 순이다. 예산실장과 이재국장이 막강한 자리임을 인정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공자원부 상역국은 상공부가 탄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국 명칭이 바뀌지 않은 유일한 부서다. 상역국은 수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부서라는 특성으로 상공자원부 내에서 수석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역정책과 △수출진흥과 △수출관리과 △무역보험과 △수입과 △무역협렵과 등 6개 과에 인원은 60명으로 재무부 이재국과 같다.

상공자원부 국 ·실장 4명이 10위권 내
그렇지만 최근 들어 상공자원부에는 각 부서 사이에 약간의 위상 변화 조짐이 있다. 신경제 의지를 뒷받침하는 산업정책국과 중소기업국 등을 거느린 기획관리실이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획관리실은 다른 부처와 마찬가지로 주로 국회관계 업무에 치중하는 실속 없는 부서로 인식됐으나, 최근 업무 조정에서 기존의 중소기업국 이외에 산업정책국과 에너지정책국등 상공부와 옛 동자부의 정책 부서를 휘하로 끌어들여 수석 부서로 올라서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산업정책국은 신경제의 기본 방침인 행정규제 완화라는 주요 임무를 맡고 있다. 산업정책국의 秋俊錫 국장은 “행정 규제로 인해 기업이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이나 각종 불필요한 규제를 하나라도 더 발굴해 줄여나가자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라고 말했다.

재무부 세제실장은 최근 금융실명제 실시로 인해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자리이다. 실명제는 흔히 ‘금융 혁명’으로 불리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제 문제’로 보는 것이 본질에 가깝다. 따라서 지난번의 토초세 파문처럼 세금 문제는 앞으로 폭넓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쟁점으로 등장할 전망이고, 이에 따라 세제실장의 자리도 위상 변화가 예상된다. ‘실명제팀’이 부서 명칭이 아닌데도 8위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10위권 내에 상공자원부 소속 국 ·실장 자리가 4개가 포함돼 경제 5개 부처 중 영향력 있는 자리를 많이 거느린 것으로 나타난 것도 한 특징이다.

10위권 밖으로는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장, 건설부 건설국장,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 등이 언급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공정거래위원장이 매우 낮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새 정부에서는 과거 정권과 달리 공정거래위원장자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는 김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를 맡았던 韓利憲씨가 공정거래위원장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제 행정이 선진국형으로 접어들수록 공정거래위원장 같은 부서가 힘을 발휘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이번 조사에서 공정거래위원장의 순위가 낮게 나온 것은 아직 이 분야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 크게 변하지 못했다는 한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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