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김영삼’ 이건희가 떴다
  • 김방희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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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이건희식 개혁을 김영삼식 개혁에 빗대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개혁의 속도와 추진 방식이 비교 대상이 됐다. 보통 사람들의 예상보다 훨씬 파격적인 개혁을 여론을 배경삼아 혼자 밀어붙이는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이 화제였다. 차이가 있다면 이건희 회장이 대통령이 금기시한 골프를 찬미했다는 정도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돌 정도였다. 이회장은 골프를 야구 ·럭비와 함께 삼성그룹의 ‘3대 종목’으로 거론한 적이 있다.

비교되는 쪽에서도 이를 수긍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히려 일부 청와대 인사 가운데는 이건희 회장이 밀어붙인 ‘삼성 개혁’의 지나치게 독단적인 측면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잘해보자는 것인데 안좋게 볼 필요가 있느냐’고 반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17일 이를 증명이나 하듯 김영삼 대통령은 재벌 총수 면담으로서는 최초로 이건희 회장과 만났다.

시류 따라 정주영 ·박태준 ‘침몰’
영향력 있는 기업인에 관한 올해의 설문조사에서 두드러진 것은 바로 ‘삼성 개혁’의 주역인 이건희 회장의 ‘떠오름’이다. 2세 경영인인 그는 유수한 창업주들을 제치고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으로 뽑혔다. 3명을 꼽으라는 질문에서 그를 포함시킨 응답자는 75.5%. 압도적 우위였다(29쪽 표 참조).
영향력 있는 기업인으로 뽑힌 10위까지의 기업인 가운데 이건희 회장은 유일한 2세 경영인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원로일수록 영향력에 대한 평가는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인으로 국한하지 않고 모든 분야를 통틀어 영향력 있는 인물이 누구냐를 묻는 종합순위에서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전 민주당 대표,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네번째로 뽑혔다. 설문조사를 해온 지난 4년간 일반 국민과 전문가집단을 대상으로 했을 때 항상 4위에 올랐던 기업인은 정주영씨였다. 그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고 꼽힌 사람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양김씨가 있었을 뿐이다(세 사람의 순위는 시기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했다). 이번 조사에서 그는 4위 자리를 이건희에게 내주고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가라앉음’은 충분히 예견할 만한 일이다. 정치에 참여했다 실패한 후 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위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과거 10위 안에 들었던 박태준 전 포항제철 명예회장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도 자기가 선택한 정치 행로 때문에 영향력을 잃은 경우이다.

그렇다면 기업인의 영향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과거의 설문조사 결과는 기업인의 영향력을 재는 몇가지 잣대가 있음을 알려준다. 우선 기업인이 소유한 기업의 규모. 지난 4년 간의 설문조사 결과, 순위가 뒤바뀌기는 했지만 5대 재벌 총수들은 대개 ‘영향력 있는 기업인’ 순위에서 5위 안에 들었다. 기업이 클수록 영향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정주영 ·정세영 씨가 여전히 4위와 6위에 머물러 있는 것도 현대그룹의 덩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기업인 순위는 반드시 기업의 규모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순위 자체는 시류를 민감하게 반영한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박태준 전 포철 명예회장의 순위가 낮아진 것만 해도 그렇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정치인과 달리 기업인의 영향력은 정치인을 통한 간접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새로 등장하거나 올라선 김선홍 기아자동차회장(7위)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8위)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9위). 사실이든 아니든 이들은 김영삼 대통령과 가까운 기업인들로 알려졌다.

삼성그룹, 경제 정책 수립에 영향 끼쳐
‘이건희 신드롬’을 낳은 이건희 화장의 떠오름 역시 시류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표본특성별 순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언론계 응답자 89%가 이건희 회장을 꼽아 다른 표본집단에 비해 그의 영향력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경제계도 행정관료나 교수, 정계 인사들에 비해 비교적 높이 평가한 표본집단이다. 언론계와 경제계는 삼성그룹과 함께 이건희 신드롬을 만들어낸 집단이다.

젊은층일수록 이건희 회장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50대보다는 40대가, 40대보다는 30대가, 30대보다는 20대가 그렇다. 젊은 층일수록 기업인의 영향력을 실감하기보다는 여론에 민감하다. 이들의 개혁 성향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볼 때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이건희 회장의 말에 ‘설득’되기 쉽다. 이 점을 감안하면 이건희 회장의 영향력은 다분히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러나 최근 이건희로 상징되는 삼성그룹이 경제 정책에 직간접으로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우선 그는 사회간접자본의 중요성을 집요하게 지적한 끝에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금융실명제 보완대책의 경우도 삼성그룹의 영향력이 잘 드러난 경우이다. 그룹의 싱크탱크에 해당하는 삼성경제연구소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된 후 ‘금융실명제의 예상 파급효과 및 성공을 위한 보완대책’이라는 자료를 냈다. 이 자료를 통해 삼성그룹은 금융실명제로 인한 경제적 충격과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명식 장기채를 발행하는 방안과 국세청 통보기준을 완화해줄 것을 제안했다. 9월24일 정부가 발표한 금융실명제 보완대책에는 이 건의의 대부분이 수용되어 있었다. 정부가 삼성그룹의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보는 게 무리라 하더라도, 여론을 제대로 짚는 삼성그룹의 능력은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 부처 관료들은 경제 정책을 세우면서 민간부문의 목소리를 참조한다. 이때 각 기업에 해당사안에 대한 기업의 자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그룹은 다른 그룹과 달리 이 요구를 자기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다. 가능하면 완벽한 보고서를 정성껏 만들어 제출한다. 이 때문에 경제 부처 관료들 사이에서는 삼성그룹이 작성한 보고서가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된다. 금융실명제 보완대책을 만들 때도 삼성그룹이 만든 보고서가 정부 부처에서 인기였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개혁을 주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영향력은 삼성그룹의 영향력이었을 뿐 이건희 개인의 것은 아니었다. 삼성그룹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이 영향력 있는 기업인으로 거론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시사저널》이 지난 89년부터 해마다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그가 종합순위 10위 안에 오른 적은 거의 없다. 지난해 전문가 집단만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위에 오른 적이 있을 뿐이다.

창업주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대그룹이라면 그 기업의 영향력은 기업인의 것과 동일시되게 마련이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 개혁’을 통해 비로소 그같은 기틀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2세 경영인으로서 자기의 입지를 삼성그룹 내외에 확고히 구축한 이건희 회장은 자기가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으로 꼽혔다는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척 부담스러워할 것이라는 게 삼성그룹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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