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시민운동이 내 직업”
  • 김당 기자 ()
  • 승인 199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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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徐京錫 사무총장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금년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운동권과 군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좌 ·우 세력이 퇴조하고 시민운동 단체가 떠오른 현상이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창립 4년 만에 가계 전문가 집단으로부터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로 지목을 받았다. 서경석 경실련 사무총장 또한 민간 부문에서 여섯번째로 영향력 있는 개인으로 떠올랐다. 목사이자 시민운동가인 서경석 사무총장을 만나 경실련의 공과와 개혁 시대의 역할에 대해 물어보았다.

《시사저널》창간 4주년 기념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목사님 정치하셔도 되겠습니다. 혹시 정치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전문가 집단이 저한테 높은 점수를 주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민운동가 서경석에게 준 것이지 정치인 서경석에게 높은 점수를 줄 리가 없다고 봅니다.

경실련 관계자들이 새 정부 요직에 참여하는 일을 놓고 내부적으로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원칙을 세웠습니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정부와의 관계 설정을 두고 내부적으로 민감한 토론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실련 간부들이 정부의 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지난 정권에서도 있었던 일입니다. 다만 새 정부 출범 후에 언론매체가 경실련 참여 부분에 대해 지나치게 주목한 것뿐입니다. 경실련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민간 단체도 정부에 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경실련은 개인이 정부위원회에 참여해 활동하는 것을 재량에 맡기는 것과 경실련이 공식으로 파견하는 것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새 정부와의 관계 설정에서 큰 변화가 있습니까?
저희는 정부가 잘못할 때는 비판하고 잘할 때는 지지하고 미흡한 것은 보완하는 방식으로 정부와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경실련이 출범한 이후 일관되게 지켜온 입장입니다. 다만 그동안에는 정부가 경제정의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데 후퇴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칭찬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새 정부에 대해서는 창찬할 일이 꽤 많아졌다는 것이 다릅니다. 경실련 자체가 서 있는 자리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닙니다.

“경실련이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로 선정된 것은 돈의 힘이나 다수의 힘보다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시민운동이 더 높이 평가됐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수십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던 m, 군과 안기부 그리고 재야 ·학생 운동권을 제치고 사회 ·시민 단체가 부각되고 그 중에서도 경실련이 단독으로 1위로 떠오른 배경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최근의 한약 조제권 분쟁 해결에 경실련이 노력했다는 것 때문에 후한 평가를 얻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송구스럽기조차 합니다. 한가지 긍정적인 것은, 이제 우리 사회가 경실련과 같은 단체를 영향력 있는 단체로 선정했다는 것이 갖는 중요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전경련으로 상징되는 돈의 힘이나 노동단체가 가진 다수의 힘보다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고 정론을 피력하려고 하는 운동,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시민운동의 힘이 더 높이 평가받음으로써 우리 사회의 앞날에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부터 경실련 창립을 계획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는 지난 70년대를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6년간 생활하면서 공산주의 사회와 북한의 실상에 대한 진실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사회주의 혁명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결론을 갖고 귀국했습니다. 그 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1년간 원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은, 운동권으로 하여금 좀더 합리적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그 당시 가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당한 반발에 직면하게 돼 우여곡절 끝에 운동권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경실련 운동에 대한 아이디어는 귀국후 1년 동안 한국 사회의 상황과 변화를 지켜보면서, 특히 89년 봄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을 고리로 해서 진보적인 사회 분위기가 보수반동적인 분위기로 반전하는 상황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다시 진보 쪽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인가에 고민을 집중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조사 결과에서 경실련이 전경련과 노총을 앞질렀는데 한 ·약분쟁에서 보여준 중재와 조정의 실력을 앞으로 노사분규에서도 발휘할 의향은 없습니까?
사실 이미 중재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난 봄 임금협상에서 전노협 소속 작업장이던 안산지역 6개사 노조 대표와 업주 들을 함께 초청해 세차례 간담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를 통해 노사 양측이 서로 불신감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하게끔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노조는 6% 임금인상에 합의했고, 기업주는 연말에 이익이 남을 경우 특별 상여금을 지급키로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주는 노동조합에 기업 경영을 공개하고, 비록 낮은 차원이기는 하지만 경영참여를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경실련은 머리만 크고 손발이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 지방 조직과 회원 수는 얼마나 됩니까?
17개 도시에 지부가 있고 전체 회원이 1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조직이 커지다 보면 운영 자금도 많이 들 텐데 한달 운영비가 얼마나 되고 자금 조달은 어떤 방법으로 합니까?
운영자금은 많이 드는 게 사실이고 늘 고민거리입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전력은 모든 예산을 분산해 각 조직이 독립예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각 조직을 독립채산제로 운영하는 것이지요. 저는 조직국 ·기획실 등 사무처 조직 운영비만 책임을 맡고 있는데, 한달에 2천만원은 확보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현재 회원 회비가 40%정도밖에 안돼 60%를 특별 모금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뒤늦게 목사 연수를 받을 결심을 하셨습니까?
저희 집안은 한국 최초의 기독교 집안입니다. 제 증조부는 한국에서 첫 목사이자 첫 교회(황해도 소래교회)를 세우신 분입니다. 제가 뒤늦게 목사 안수를 받게 된 것은 그런 기독교적 영향을 받은 바 큽니다. 제가 목사가 될 것을 최종 결심한 때는 지난 80년 세번째 징역을 산 감옥에서인데, 그때는 인권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목사가 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목사가 되어 귀국하니 민주화 고정이 열리는 상황이 되었죠. 그래서 지금은 시민운동을 직업으로 하는 독특한 모습의 목사가 된 셈입니다.

담임을 밭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금 나가고 있는 교회는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교회라는 작은 교회인데, 거기서 친구인 담임목사를 도와 목회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정부에 대해 문민 독재로 갈 수 있다는 일부 비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민 독재로 흐르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대통령이 독점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개혁은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의 적극적 참여를 통한 온국민의 개혁 운동으로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국민이 나서서 개혁을 주창하고 정부가 이를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지금처럼 대통령 한사람만 점점 더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커지는 것은 사회를 아주 취약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끝으로 목사님께 ‘광고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뜻있는 시민이 많이 시민운동에 회원으로 참여해 선한 힘이 끊임없이 모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 국민들이 무기력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뒤에서 불평불만하는 것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른바 문민 시대도 도래한 만큼 이제 국민이 주인의 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책임을 온국민이 느끼고, 이를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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