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는 ‘눈꼽’ 기대는 ‘태산’
  • 김상현 기자 ()
  • 승인 199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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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출연 연구소, 실적주의에 밀려 표류…기초과학 연구 엄두 못내



지난 10월5일 한 석간 신문에 정부 출연 연구소들이 연구는 게을리한 채 방만한 운영을 한다는 기사가 났다. ‘정부출연 연구소 운영 엉망’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과학기술원 →원자력연구소 등 정부출연 연구소(정출연)들이 정원을 67%나 초과 채용하고 상당수의 실험용 기자재를 연구에 사용하지 않는 등 방만하게 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10월4일 감사원이 국회에 낸 감사 결과가 그 근거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연구소들에서 특정 과제 연구를 위해 임시 채용한 행정보조 요원들을 정규직으로 돌리면서 연구소 인력이 정원 6천9백9명을 훨씬 초과한 1만1천5백71명에 이르렀으며, 실험용 기자재 7백79점 중 2백35점을 연구가 끝난 뒤에 도입해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 신문 보도대로라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국내 과학 ·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G7 프로젝트’를 한창 추진하는 때이기에 더욱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그 기사는 오보로 판명됐다. 감사원은 기사의 근거가 된 ‘92년도 감사 결과’가 사실은 91년 감사 결과이며 이미 92년 3월 시정 조처를 발표했다고 밝혔다. 감사원의 한 관계자는 “이미 93년 예산에 시정한 관리지침을 반영했으며, 각 부처별로 이행 여부를 관리 ·감독하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과학기술처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소한의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보도한 신문의 무책임성에 분개한다면서 “지난 6월에 정출연 활성화를 위한 세부 개선방안까지 마련해 연구 효율화를 위한 세부 개선방안까지 마련해 연구 효율화에 힘쓰는 사실을 도외시해 유감스럽다”라고 말했다. 한국화학연구소의 한 연구원도 “가뜩이나 연구원들의 사기가 떨어진 마당에 그렇게 보도한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흥분했다.

그 신문의 보도는 잘못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인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길게는 감사원의 91년 감사 이후, 짧게는 정출연 활성화를 위한 개선방안이 나온 이후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왔는가 하는 소박한 질문이다.

현재 정부출연 연구기관은 인문사회계 18개, 과학기술계 22개로 집계되며, 이 중 과학기술처 산하 기관은 21개이다. 이들 기관에 대한 93년 예산은 92년보다 21% 오른 약 7천2백억원이었다(41쪽 표 참조). 예산이 전년보다 2배 가까이 오른 과학기술정책연구소와 한국기계연구원, 그리고 유일하게 예산이 깍인 한국과학재단이 눈길을 끈다. 앞의 두 기관은 인력도 크게 늘어 박사급만 각각 11명, 39명이 보강됐다. 합계상으로는 3백66명(박사급은 55명)이 늘어난 것으로 돼 있으나, 많은 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업무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설 시스템공학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작년 감사원의 감사 결과 발표후 연구소에서 정원외 인력을 채용하려 하지 않아 일선 연구원들만 죽을 맛이다”라고 말했다.

정출연 연구원들의 ‘고행’은 91년 8월 김진현 당시 과기처장관이 ‘기능 재정립과 운영 효율화’를 외치며 많은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을 축소 ·통폐합하고 성과급제 ·연봉제를 도입할 때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화학연구소의 경우 2년 남짓한 사이에 1백여 연구원이 짐을 쌌다.

당시 김진현 장관이 추진했던 정출연의 기능 재정립 및 운영 효율화 방안은 단적으로 말해 ‘당장 상품이 되는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장밋빛으로 포장돼 나온 ‘G7 프로젝트’라는 것도 결국은 국책 과제를 기업 위주 과제로 바꾼 데 지나지 않았다. 정출연이 장기연구 과제나 기반 기술보다 기업의 단기 요구에 부응하는 연구 과제에 주력하도록 몰아간 기능 재정립 정책은 G7 기획단장이나 정출연 합동평가단 총괄분과위원회에 민간 대기업 간부들이 포함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총괄분과위는 정출연의 기능 및 역할 재정립안을 작성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정출연에는 기업의 요구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프로젝트 발주 기준, 연구비 지급 기준 등 갖가지 족쇄가 채워졌다. 가뜩이나 연구비는 고사하고 정원의 인력에 대한 인건비조차 제대로 마련하기 어려운 정출연으로서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민간기업 연구소와, 또는 같은 정부출연 연구기관과 기능이 중복된다는 이유로 축소 ·통폐합되는 곳이 생겼고, 성과급제 ·계약제 등 다양한 고용 형태가 등장했다. 신분에 불안을 느끼거나 연구에 회의를 느끼고 퇴직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정출연의 운영 실태가 엉망이라는 진단이 나온 91년의 감사 결과는 그러한 연유에서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비판과 함께 ‘정치적인’의도가 개입됐다는 지적을 받는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고분자기능재료연구실 김정엽 실장은 언론의 단골 표적이 되는 초과 채용 문제에 대해 “정원을 넘겨 채용한 연구기관보다 정원을 비현실적으로 낮춰잡은 정부의 불합리한 인력 정책이 비판받아야 한다”라고 반박한다. 정부가 처음부터 연구소 인력의 70~80%만을 정원으로 잡은 데다 그에 대한 인건비조차 3분의 2정도밖에 지급하지 않아, 정원의 인력에 대한 인건비를 자체 마련해야 하는 연구소로서는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임시직 ·위촉직 ·별정직 같은 정원외 인력은 연구 과제가 끝나거나 새로운 과제가 주어질 때마다 들쭉날쭉이어서 정확한 숫자를 잡아내기가 어려운데도, 이를 뭉뚱그려 ‘정원의 67% 초과 채용’이라고 단정한 것은 사실을 호도할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정원은 1백50명인데 직원은 2천여 명
한국화학연구소 고영주 연구원은 “정부의 정원 제도가 너무 경직됐다”라고 비판한다. 국내 최초로 전전자교환기(TDX)를 개발한 전자통신연구소는 정부출연 일선 연구원들 사이에서 근무 환경이 가장 좋은 곳으로 꼽힌다. 현재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2천여명. 그러나 정부가 잡고 있는 정원은 1백50명이다. 나머지 1천8백50여 명은 정부가 인건비를 대지 않는 정원외 인력이다. 정출연의 현재 정원은 표에서 보듯이 채 1만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원자탄을 만든 곳으로 유명한 미국의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의 경우 연구원 만 7천명, 그 중 박사가 4천여 명에 이른다.

고영주씨는 “프로젝트마다 필요한 인력이 다르고, 일손이 달리거나 전문성이 필요해 임시 연구원을 보강해야 할 경우도 많다. 연구과제의 특성을 모르고 임시직 채용을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하는 정부나 언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정출연의 일선 연구원들이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연구 과제가 끝난 뒤에 실험기자재를 도입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비판도 너무 일방적이라는 주장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김정엽 박사는 그러한 비판이 연구원의 실상을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구입할 실험기자재를 선정해 발주하는 데에만 6개월이 걸린다. 정부가 요구하는 온갖 복잡한 절차를 거치다 보면 그 기간은 더욱 길어진다. 더욱이 연구 과제가 6개월이나 1년 안에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또 해당 연구 과제를 끝냈다고 해도 거기에 사용한 실험기자재는 다른 연구 과제에 계속 이용할 수 있다.“

정출연은 ‘정부’가 자금을 대 만든 기관이지만 정부 관료와 정출연 직원 간의 시각이 일치하는 경우보다 서로 대립하는 때가 더 많다. 정부에게 정출연은 아까운 예산만 까먹는 천덕꾸러기로 비친다. 수천억 예산을 쓰면서도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모든 것을 정부에 의존하려고만 한다. 기관 운영이 비효율적인 데다 연구 과제라는 것도 산업현장에 당장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정출연 역시 정부에 할 말이 많다. 무엇보다 간섭이 너무 심하다. 장관 바뀔 때마다 정과제를 네 가지로 잡았다. 그것은 △연구자가 국가 사회 발전에 대한 사명감을 갖도록 하는 의식 개혁 △연구원의 사기 높이기 △연구의 효율성 높이기 △기관장의 자율과 책임을 높이는 경영 체제 확립 등이다.

노조원 90%“기회 있으면 떠나겠다”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 서울지역 정출연 노조협의회가 지난 4월1일부터 6일까지 17개 정부출연기관의 2천여 노조원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 조사 결과는 정출연 직원들의 사기가 얼마나 형편 없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사에 응한 대다수 노조원(81.1%)은 연구 및 운영의 자율성에 불만을 느끼며, 임금 및 처우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수(93.6%)가 불만스러워했다. 처우에 대한 불만(40%)과 전망이 없어서(37%) 기회만 주어진다면 정부출연기관을 떠나겠다는 조합원이 응답자의 90%를 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기처는 각종 수당을 신설하고 ‘장기적 차원에서’ 급여 수준을 높이겠다는 복안을 내놓았다. 당분간은 연구원들의 인내와 사명감이 더 요긴하게 작용할 듯하다.

연구 성패의 관건은 연구비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는가에 달려 있다. 과기처는 이와 관련해 올해 1천30억원 규모인 특정연구개발사업비를 97년까지 2천6백32억원 규모로 늘릴 계획이다. 그와 함께 과학기술진흥기금을 92년부터 96년까지 1조89억원으로 늘린다는 야심도 가지고 있다. 해외 교포 우수 인력 활용 방안으로 ‘브레인 풀(brain pool)’을 추진한다는 계획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그동안 ‘낙하산 인사’ ‘위인설관식 직제 신설’등 거센 비판을 들어온 이사회 체제에도 상당 부분 칼을 댈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이사회는 이름뿐인 최고 의사결정 조직으로 사실상 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아왔다. 기관장 등 임원을 선임할 경우도 사실상 정부가 사전에 내정한 인사를 그대로 승인하는 ‘거수기’ 노릇밖에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이사 7~15명 가운데 4~10명이 정부 관계 부처 고위 공무원 몫인 당연직 이사였으나, 해당 연구기관의 특성이나 전문성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름뿐인 이사회다 보니 참석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한 조사에 따르면 당연직 이사의 경우 본인 참석(46%)보다 다른 사람이 대신 참석하는 경우(50%)가 더 많았다.

과기처는 유명무실한 이사회를 ‘복권’하기 위해 해당 연구기관의 책임자급 연구원 2명을 이사회에 참여토록 하고, 5명으로 구성된 기관장 선임위원회를 신설키로 했다.

과기처의 개선 방안이 얼마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결실을 거둘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98년까지 GNP의 4%를 과학 ·기술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의 공약이 김영삼 대통령의 이른바 ‘신경제정책’이 발표되면서 GNP의 3~4%로 슬그머니 줄어버린 것을 볼 때 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현재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수출 2위를 달리는 한국의 실상은 참담하다. 핵심 부품을 설계하는 기술이 없을 뿐더러 반도체 산업 자립도가 4%밖에 안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한 중견 연구원은 “정부나 일반 국민이 기술 개발의 어려움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라고 한탄한다. “멀리 보아야 한다. 정부가 강조하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는 당장 돈이 되는 상품을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연구와 투자가 요구되는 기초기술을 개발하는 데 있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제자리를 잡아주는 일이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라고 볼 때,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의 인력과 예산이 대폭 늘어난 점은 그나마 한가닥 밝은 전망을 낳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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