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속에서 소설 쓰겠다”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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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석영씨 ‘남북 만남의 이야기’ 장편 구상…국내외서 석방운동 전개

“일심이 끝나는 대로 소설 쓸 거야.” 지난 10월7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 4호 면회실.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 두 개와 ‘철창 칸막이’가 먼저 면회객을 맞는다. 수인번호 83번이 새겨진 흰색 한복 차림의 황석영씨는 면회객이 누구인지를 살피다가 이내 “어어, 그래" 하며 칸막이 가까이로 몸을 내민다. 안경 너머로 부라리는 큰 눈과 윤곽이 뚜렷한 얼굴. 작가 황석영씨는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았다.

시력이 나빠진 것과 치통을 빼면 건강도 괜찮다고 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승철 사무국장(시인)과 동행한 이 날 면회에서 황석영씨는 “25만달러가 북한 공작금이라는 검찰의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그것은 《장길산》영화 원작료가”라고 잘라말하고, 예의 그 큰 웃음을 섞어가며 아직 면회 오지 않은 후배들을 ‘호통’쳤다.

7분  동안의 짧은 면회가 있던 이 날 오후 일본에서는 일본 펜클럽 주최로 ‘작가 황석영 석방촉구 대회’가 열렸다. 도쿄 유엔대학교에서 일본 문인 2백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행사에는 한국 쪽에서 작가 김원일씨(작가 황석영 석방대책위 공동위원장·한국펜클럽 인권위원장)와 이번 사건의 변호인 가운데 한 사람인 한승헌 변호사가 참석했다. 김원일씨는 일본 펜 회원들 앞에서 “위대한 작가의 순수성과 제도를 초월한 행위는 마땅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 문학의 역할은 매우 크다. 분단 모순을 해결하려고 활동하다가 투옥된 작가의 아픔을 함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일본 펜클럽을 비롯, 영국 런던 펜클럽 본부, 국제사면위 영국세계본부(엠네스티 인터내셔널), 아시아 워치, 독일 예술원, 미국 펜클럽 등은 황석영씨가 지난 4월27일 귀국 즉시 당국에 체포, 구속되자 석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띄우는 한편, 현지에서 모금 운동 및 출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보다 앞서 지난 9월25일,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 대강당에서는 작가 황석영 석방대책위원회(공동위원장 신경림 ·염무웅·강연균·김원일)·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 공동 주최로 ‘황석영 문화제’가 열렸다. 미술 평론가 유홍준씨(영남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문학제에는 문익환 목사, 작가 천승세씨를 비롯한 재야, 문화예술계, 정계인사 및 애독자 등 8백여 명이 강당을 메워 그의 문학과 삶을 재조명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황석영씨와는 문학관이 다른 작가 이문열씨가 참석해 황석영씨에 대한 자신의 추억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오른쪽 상자기사 참조).

문학제가 열리기 직전, 석방대책위가 엮은 황석영씨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발간되어 출간되자마자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한편 작가 황석영 석방을 위한 시민 서명 운동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석방대책위에 따르면 10월 초순 현재 2만명이 넘게 서명을 했다.

국내외 문화예술계 인사 및 단체들이 ‘작가 황석영’의 석방 운동을 벌이는 동안,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어 있는 ‘피고인 황수영(황석영씨의 본명)’에 대한 공판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법원과 검찰측은 ‘작가 황석영이 아니라 실정법을 위반한 피고 황수영씨’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맡고 있는 서울형사지법 합의25부는 이 구분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작가 황석영과 피고인 황수영’
지난 10월4일 서울형사지법 311호 법정에서 열린 7차 공판(증인신문)에서 양삼승 부장판사는 변호인측 증인으로 출두한 재야 운동가 조성우씨(평화연구소 소장)에게 “법과 문학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현실적으로 괴리가 있다. 이때 증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조성우씨는 “이것은 법과 문학의 충돌이 아니라, 분단하회 악법의 문제이다. 남북교류법과 국가보안법이 공존하고 있는 이 현실을 사법부가 먼저 문제 제기해야 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공소장에 밝혀져 있듯이 황석영씨의 방북 및 해외 체류는 국가보안법의 거의 모든 조항(옛 국가보안법 7개 항을 비롯 국가보안법 4개항, 형법 제 37조 등)에 저촉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측은 황석영씨가 반국가단체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으로 탈출해 그 수괴와 회합 통신했으며, 지령을 받고 금품을 수수하는 한편 반국가단체인 범민련 결성을 주도하는 등 범법 사실이 뚜렷하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1심에서의 구형량이 관심거리가 되었다.(시사안테나 참조).

재판 과정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부분은 △범민련 결성 및 해외사무국 이전, 귀국 결정 등의 과정에서 북의 지시를 받았는지 여부 △25만달러가 공작금인지 여부 △반국가단체 수괴 찬양 고무 △범민련의 성격 등이다. 특히 공작금 수수 여부는 작가 황석영에 대한 ‘여론 재판’ 성격을 띠고 있어 검찰과 변호인단이 이 부분을 놓고 첨예하고 맞서 있다.

‘공작금’ 외에도 작가 황석영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그간 줄곧 있어 왔다. 그의 방북 소식이 알려졌을 때, 일부에서는 그의 행위를 두고 ‘돌발적인 소영웅주의’라고 비난했는가 하면, 문익환 목사나 임수경양과 비교하면서 “처벌이 두려워 해외에 도피하고 있다”는 식으로 그의 도덕성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황석영씨와 그를 아는 문인들은 그의 방북(국가보안법상 ‘탈출’)이 돌발 행위가 아니며 해외 체류 또한 명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의 방북은 그가 추구해온 분단 문학의 확대 발전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가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변호했다. 국가보안법을 실정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황석영씨는 “황석영이라고 하는 작가와 그 작품들과 지난 몇년 동안의 행동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일부분이라면, 죄와 벌을 따지기 이전에 하나의 역사로서 그의 행위와 생각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라고 모두진술에서 말한 바 있다.

황석영씨는 또, 4년 간의 해외 체류가 귀국해 감옥에서 ‘국가보안법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활동 기간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밖에서도 통일 운동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국어를 떠나 있던 그 ‘유랑 생활’은 해외의 민족운동이 자기의 생각과 많이 다르고, 무엇보다 작가로서 글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심리적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고 피력했다. 북한을 다녀온 뒤 그는 “마지막 콤플렉스를 해결했다. 이제 남과 북을 다 아우르는 작품을 쓰겠다”라고 공언하곤 했다.

“감옥 속 작가에게 펜을”
그의 석방을 바라는 이들은, 우선 그가 감옥에서 집필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남북한 작가 가운데, 남과 북을 두루 체험한 유일한 작가라는 것말고도, 역설적이지만 작가에게 감옥은 ‘더없이 좋은 창작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작가 황석영에게서 펜을 빼앗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큰 손해”라고 시인 조태일씨(광주대 문창과 교수)는 말했다. 정치범에게 집필권을 주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음을 자주 지적해온 김남주 시인(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10년간 복역)은 “그동안 극적인 삶을 살았던 자기 체험을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면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변호인단은 집필권이 곧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글쓰기에 대한 황석영씨의 열망은 대단해 보였다. 해외에 체류하면서 많은 구상을 했다는 그는 “북한의 어느 마을을 무대로 도깨비 짐승 산천이 등장해 한 판 악몽처럼 읽히는 중편소설(<호구별성>)을 쓴 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과 북 전후세대의 정신적 단절과 만남의 이야기를 그리는 장편을 쓰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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