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박광수
  • 이성남 기자 ()
  • 승인 1990.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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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성 · 예술성 적절히 조화

 80년대 한국영화계는 표현의 자유를 유예당했다는 변명 아래 ‘벗기기 영화’가 범람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의식있는 젊은 영화인들이 비제도권 실험영화를 전개하기고 했다. 성을 상품화시킨 전자의 경우, 영화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이용한 것이고, 후자는 강한 현실 발언의 수단으로 영화를 이용한 경우로서 그 어느쪽도 영화예술의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실성’과 ‘예술성’을 무리없이 연결시킨 영화로 손꼽히는 朴光洙감독의 <칠수와 만수>가 갖는 의미는 자못 크다. 이 영화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마치 옆사람에게 이야기하듯 평이한 어조로 서술함으로써 ‘강도높은 구호’보다도 폭넓은 설득력을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현실을 다루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현실을 다루며 ‘재미’를 주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영화에 감동을 부여하는 힘은 “재능있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李世龍감독의 평).” 현실을 표현할 때 자칫 이데올로기의 ‘졸병’으로 떨어질 우려가 크기 때문인데 <칠수와 만수>는 바로 이런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새로운 한국영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이 영화는 88년 11월에 개봉되자마자 7만3천명의 관객이 몰려들어 화제를 불러모았으며, 같은해 영화계의 크고작은 의미있는 상을 한꺼번에 받았는가 하면 89년에는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청년비평가상’을 수상한 작품이 되기도 했다.

 박감독 스스로 밝히는 이 영화의 특징은 ‘장소성’. 예를 들면 칠수와 만수가 사는 곳이 옥수동이면 그곳에서 벌어지는 재개발사업 등이 영상에 보여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고심끝에 정한 곳이 강남고속터미널 앞의 청록회관. 그 건물은 전경환씨 소유임이 밝혀져 5공비리의 상징체로 부각된 바 있다.

 제작비 2억원을 들여 1년6개월 동안 제작된 <칠수와 민수>는 박감독의 첫작품인 만큼, 90년대 들어와서 그의 활동에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요즈음 그는 1월말에 촬영을 시작할 새로운 영화준비로 마음이 부산하다. 광산촌에서 익명으로 살아야 하는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그들도 우리처럼>의 배경은 강원도 산간지방의 사북 · 고한 · 태백 등 탄광촌으로, 모두 해발 7백미터 이상의 高地이므로 또다시 ‘높은 장소’에서의 촬영이 불가피하다고. “이번에는 <칠수와 만수>에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소리와 영상쪽에도 관심을 가질 예정입니다.”

 1955년생으로 76년에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하여 82년에 졸업했다. 70년대 대학가에 불어닥친 ‘민중’의 개념을 접하면서 80년 5월 광주항쟁의 소용돌이까지 두루 체험한 세대이다. 재학시절에 영화서클인 ‘얄라성’에서 활동하면서 8mm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82년에는 ‘서울영화집단’을 구성하여 영화에 의한 문화 식민지화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자주적인 영화 언어를 발견해내려는 제3세계 영화운동의 선두주자로 활약했다. 83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교육특수학교에서 공부했으며 85년에 귀국하여 이장호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하며 ‘현장’을 익혔다.

 UIP직배 파문으로 ‘충무로 의식’에 대한 반성론이 제기되고 비제도권 영화운동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90년대 한국영화계의 전망에 대해 그는 매우 합리적인 견해를 펼친다. “충무로 영화냐, 비제도권 영화냐를 굳이 나눌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합일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하면서 그는 그 이유를 “영화는 그 형태가 다원화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라 한다. 아울러 “그런 영화의 특성에 맞는 소극장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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