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역한 3군사령관 高明昇대장
  • 여운연 편집위원보 ()
  • 승인 1990.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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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사랑을 싣고”

 다사다난했던 80년대를 청산하는 소리가 요란한 세밑. 서점가에는 한 육군대장이 쓴 이색적인 책이 막 나올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책은 얼핏 예상되듯 장군이 털어놓은 무용담이거나 역사를 증언하는 식의 회고록이 아니었다. 책 첫장을 들추면, 장군은 펜을 들어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세상은 온갖 가능성으로 차 있다. 나는 그 모든 가능성을 오로지 군데만 걸고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한민국 육군대장이라는 최종목표에 도달하였다. 군인으로서는 더 바라볼 게 없는 최정상에 서게 된 것이다. (중략) 아내는 두 손과 하반신이 철저하게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중환자이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온 사람이 숨을 돌리며 온 길을 되돌아보듯,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담담한 심정으로 되돌아보고 싶다.”

 책머리에서 독자들의 정서에 호소하고 있는 필자는 바로 지난 12월26일 30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예편한 3군 사령관 高明昇(54) 대장이다. 만군을 호령하는 별넷의 어마어마한 위엄에 가려져 그 누구도 헤아려보기 어렵던 그의 가슴 저 안쪽에 인간적인 사연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인간적인 사연을 담아 세상에 내보내는 책은 제목도 퍽 이색적이다.
 《휠체어에 사랑을 싣고》. 이제 군복을 벗고 홀가분해진 그가 소리없이 내민 이 책은 군인으로서 숨가쁘게 나날을 보내야 했던 한 육군대장이 단 한 발자국도 육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와 더불어 살아온 인생역정을 담담하게 적은 것이다.

 高장군의 아내 윤광희(50)씨는 척추마비로 10여년전부터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가슴 위쪽만 살아 있는 특급장애자이다. 인생의 황금기를 그의 아내는 처절한 투병으로 세월을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육사15기 동기생 중 최초로 사성장군이 되까지 고속질주만을 거듭해온 그를 기자가 만난 것은 전역식을 며칠 앞두고였다. 전북 부안 출신의 高장군은 5공에서 6공에 이르는 격변기에 군 핵심요직을 두루 거친 끝에 야전군사령관의 중책을 마감하는 착잡한 상황임에도 갑자기 방문한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처음 부인께서 발병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77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도경비사 경비단장으로 있을 때인데 마침 박대통령이 방문해 굉장한 칭찬을 해준 날이었지요. 기분이 좋아서 집에 갔는데 모두들 우울한 표정이 돼 있습니다. 아내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는데 저는 대수롭잖게 생각했어요. 그런 일이 있은 후 군인들이 가장 기다리는 일요일날 쇼핑이라도 나가면 아내는 나한데 자꾸 몸을 의지하곤 했어요. 병원에서 진찰해보니 척추경막증인가 진단이 나왔는데 대수술을 받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다른 차원에서 명의를 대봐야겠다고 판단하고 미국 미네소타병원까지 가서 두번째 수술을 받았는데 오히려 더 악화돼버렸습니다.

 그후 83년인가,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있을 때인데 청와대에 보고할 일이 있어 경호실에 막 들어가려는 순간, 부관한테서 무전이 왔어요. 보고도 미루고 급히 돌아오라는 겁니다. 딱 짚이는 게 있어 가보니 호흡은 멎어버렸고 혈압은 40으로 떨어지고 의료진들은 아예 손을 놓은 상태였어요. 무조건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겼는데 두시간쯤 지나니까 맥도 살아나고 몸도 따뜻해지더군요.

 이 지구상 어딜 가서라도 살려봐야겠다는 집념 하나로 사방을 수소문해 뉴욕대학병원까지 가 세번째 수술을 받았지만 더더욱 나빠졌습니다. 다행히 처가가 뒷바라지해줄 여유가 있어 이런저런 시도를 다 해볼 수 있었어요.

부인 병간호 하시면서 가슴 아픈 일도 많았겠어요.
 거의 중요한 공무를 제외하고는 아내와 단둘이 드라이브하거나 가족과 함께 쇼핑가는 것이 큰 낙입니다.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가끔 쇼핑을 나가는데 어떤 백화점 통로는 어디 있는지 훤히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롯데백화점에 갔다가 여성용 화장실 앞에서 얼찐거린다고 일하는 아주머니한테 단단히 야단맞은 적도 있습니다. 딸아이가 엄마를 화장실에 데려갔는데 시간이 지나도 안나오길래 그 앞을 왔다갔다 하다가 혼났지요. 또 한번은 어느 백화점에서 아내를 밀고 가다가 사람들로 복잡한 통로에서 30대 부인의 발을 밟게 됐는데 막 화를 내더라구요. 그런 일들이 이상스럽게도 가슴 아프게 느껴지더군요.

여러 가지로 경황이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책을 쓰겠다는 엄두를 내셨습니까?
 처음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까진 없었습니다. 그냥 한 아버지로서 무언가 자식들에게 남겨주고 싶다는 충동에서 혼자 긁적거려 세 아이들에게 하나씩 복사해 주려고 했던 것인데 주위에서 어떻게 알고 권한 것이 책으로 엮어져 나오게 됐습니다(그는 슬하에 출가한 두 딸 영진(27), 희경(25), 아들 영훈(18)군을 두었다).

 행복의 기준에서 본다면 어떨지 몰라도 소망의 기준으로 따져보면 저는 이 세상에서 몇 안되는 행운아입니다. 군인으로서는 최정상까지 올랐으니 대성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쪽에서는 제 가족이 정반대로 파멸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겁니다. 그점이 저로선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지요.

 혹 장군답지 않게 너무 감상적이란 비판을 들을까 걱정됩니다. 결코 어떤 슬픔이나 고통을 하소연하자는 것이 아니거든요. 남다른 체험을 그저 후배들이나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출판하는 데 동의한 것 입니다. (이 책은 ‘그날의 죄인’ ‘결단의 순간들’ 등 총 15장으로 돼 있다. 高장군은 책머리에서 “제3 · 4 · 5공화국의 격변과 제6공화국의 태동을 시각하면서 아직은 말할 수 없는 많은 사연들과 함께 격변을 공교롭게도 모두 현장에서 목격한 나! 그저 먼 하늘을 우러러보며 회한의 눈물과 10여년간 휠체어에 인생을 의지하며 생활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의 처지를 입술을 씹고 또 씹으며 公私생활을 하였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또 마지막 ‘끝나지 않은 에필로그’에서 마음속의 ‘사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 책을 쓰겠다고 하셨을 때 곁에서 부인께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처음엔 물론 극력 반대했습니다. 세상사람 웃기게 하려는 거라고 펄쩍 뛰더군요. 그렇지만 원래 참뜻이 자식들에게 남겨주겠다는 거였으니까 곧 저의 뜻을 이해해주었습니다.

원고는 직접 쓰고 정리하셨습니까? 최고 지휘관이란 위치에서 자연인의 모습을 그려낸다는 것이 한편으로 굉장히 부담스러웠을 것 같은데요.
 출판관계쪽에서 사성장군이 직접 썼다고 하니까 처음엔 안믿습디다. 학교 어디 나온 사람이냐고 물어보더래요. 제가 본래 전주사범 출신입니다. 여태까지 자리를 옮겨다니면서 취임사나 이임사를 한번도 남의 손에 시켜본 적이 없습니다.

 원래 소령시절부터 시작한 일기 쓰는 습관이 지금껏 계속돼오고 있어요. 전방의 지휘관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혼자 갖는 시간이 많은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때는 50~60페이지까지 나갈 때가 있어요. 일기라는 개념보다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사고의 흐름을 그냥 적어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정리하는 데도 별로 어려움은 없었어요. 다 쓰는 데 한 5개월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원고를 정리하면서 특히 어려웠던 점이나 견디기 어려웠던 순간들도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눈물이란 어떻게 보면 메말라지는 것일 텐데 써내려갈 수 없게 눈물이 나올 때도 많았습니다(그는 이 대목에서 다시 눈물을 비쳤다). 모든 사람이 걸어다는데 그렇게 건강했던 사람이 무슨 죄가 많다고 이 지경이 됐나, 불쑥불쑥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오르는 겁니다.
 처음 3년은 저 자신 한 인간, 한 사나이로서 무척 짜증스러웠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3년이 지나니까 진심으로 사랑이 생기더군요. 가족 이전에 여인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오던데요. 그 이후 가족에 대한 사랑은 ‘도취’라고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저의 중심을 잡아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주부’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도 깨닫게 되었죠. 아내가 숨만 깔딱깔딱하고 침대와 휠체어만 왔다갔다 하는데도 가정은 완전히 유지됩디다. 그 사람이 없다면 가정은 기둥뿌리째 흔들려버리겠지요.

워낙 부부애가 각별했나 봅니다.
 그냥 중매로 만나 한달만에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서로 다툰 기억이란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어려움이 닥치면서 온가족이 더욱 신앙을 가까이하게 됐어요. 현재도 믿음으로 의지하고 삽니다. 가슴 위만 살아 있는 아내의 얼굴에도 늘 웃음이 떠나지 않을 만큼 평안합니다. 그래서인지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은 편입니다.

모든 남편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군인이란 직업은 아내의 내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高장군께서는 이 점에서 어려웠던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텐데요.
 좋은 지적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내조란 게 가정을 소리없이 다스리고 밖에서 군대생활하면서 집안일엔 신경 안쓰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밖에서 생각하듯 군의 세계에선 ‘우먼 파워’라는 게 전혀 작용하질 않습니다. 제 가족의 경우가 그것을 입증한다고 본다면 될 겁니다. 물론 인간사회란 정이 오고가는 것인지라 모임이나 별도의 교류같은 것은 있을 수 있겠지만.

 제 경우, 가족이 그렇기 때문에 부대생활에 영향있지 않겠느냐, 우려하겠지만 가족문제를 그대로 안은 채 대부대를 지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사성장군까지 될 수도 없었을 테고, 일단 대문을 나서면 한사람의 武人으로 돌아가고 집에 돌아오면 평범한 한 가장이 됩니다.

교편생활을 잠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인생의 진로를 바꿀 결심을 하셨습니까?
 전주사범학교 학창시절에 총학생회장을 지냈는데 졸업 후 학생회장은 자동적으로 전주 시내로 발령내는 게 관례인데도 학생회 활동을 문제삼아 경기도 화성군 벽지로 발령을 내버렸습니다. 그게 결정적인 계기가 돼 교직을 아예 그만둬버렸지요. 제 꿈은 실은 존 듀이와 같은 교육철학자가 되는 거였어요.

 사범학교 동기생 중에 아직도 평교사로 지내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스승의 길’은 동경하고 있어요. 그러나 6년간의 사범교육은 군대생활에도 음양으로 도움이 됐습니다. 부하에 대한 사랑, 약한 자에 대한 배려, 반드시 먼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 등은 그때 모두 몸에 익힌 것 같습니다.

30년의 군생활, 수많은 어려운 고비를 겪으며 헤쳐왔을 텐데 이제 막상 옷을 벗게 된 입장에서 남다른 감회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특히 80년대 들어 요직을 두루 거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군이 있음으로 해서 나라가 지탱됐다는 긍정적 평가보다 특정 정치군인으로 해서 군사독재라는 역기능을 보아온 국민들은 그런 정치군인 집단을 때때로 ‘분노의 집단’으로까지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시대를 돌아보면서 물러나는 현재의 심정은 어떠십니까?
 한 가정인, 武人, 사나이로서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가정인으로서도 최선을 다했고 군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도 지탄받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조국과 군에 어떤 흠집도 내지 않겠다는 철저한 각오로 살아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골에서 태어나 명예롭게 군생활을 마치게 됐으니 행복하다는 것밖에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가정적인 어려움이야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진하듯 제 인생의 한 명암인 것이고 어떻든 국민 모두가 합심해서 국가가 번영하는 것 이상 바랄 게 더 어딨겠습니까. 국민들의 수준도 이젠 옛날과 다릅니다. 우리의 경제적 볼륨도 엄청나 사소한 저항,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젠 긍정적 사고로 극복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군대란 가장 정형화된 집단사회여서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대체로 경직된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데 그런 고정관념에서 많이 벗어난 편이란 인상을 받게 됩니다.
 군인사회가 밖에서 생각하듯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자유스럽고 민주화가 잘 돼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단 토론이 벌어지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갑론을박 격렬하게 싸웁니다. 오히려 일반 대기업체 같은 곳이 더 경직돼 있던데요. 다만 결정 집행과정이 군인으로서의 길을 무섭게 지키는 것인데 의사 결정과정은 군대만큼 개방된 곳이 없습니다.

직업군으로서 평소 갖고 계신 직업관이나 국가관은 어떤 것입니까?
 저는 늘 부하들에게 우선 내가 판단하고 결심하고 사고하는 과정이 군대를 위한 것이냐, 그리고 그것이 또 나라를 위한 것이냐를 충분히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인데 조국을 위해서는 어떤 이유나 조건없이 충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조건없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바로 가족입니다.

 또 모든 사고의 판단은 공인으로서 책임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일에 대해서는 진퇴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제 입으로 이런 얘기하는 것은 우습지만 저는 진심으로 부하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모든 의사를 결정할 때는 ‘衆智’를 모으는 편이지요. 아무래도 한사람보다는 두사람 의견을 듣는 게 낫고 그러다 보니 부하에 대한 신뢰가 저절로 쌓아집니다.

물러나는 이 시점에서 무엇인가 밝히거나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는 사항은 없으십니까? 특히 장군께서는 격변의 현장을 거의 빠짐없이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가장 고통스런 경험, 감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면 회고해주시겠어요?
 지금은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봅니다. 언젠가 얘기할 수 있을 때가 오겠지요. (高장군은 월남전에도 참전했으며 10 · 26, 12 · 12사태를 전후로 수도경비사 경비단장, 대통령경호실차장, 육사참모장, 수도방위사령관을 거쳤고 4 · 13, 6 · 29, 5共에서 6共으로의 전환기 등 격변기에 보안사령관을 지냈다.)

전역 후 구체적으로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농부도 콩나물 파는 아주머니도 나름대로 다 철학을 갖고 삽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찌 제게도 생각이 없겠어요. 우선 한 4개월간은 가족들과 가까이 살면서 좀 보살피고 주변정리 좀 할랍니다. 지난 30년간 앞만 보고 살았는데 옆도 좀 살펴보고 이사통에 뒤섞여버린 일기도 정리하고…. 그런 다음 공부할 작정입니다. 머리가 굳어 제대로 될까 걱정입니다만.

앞으로 다른 책을 써낼 계획은 없으십니까?
 중요한 시기에 이상하게 핵심적인 자리를 맡아 혹자는 그런 각도에서 기대할런지도 모르지요. 언젠가는 책을 두어권 더 써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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