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땅 '안전지대'대피중
  • 김재일 경제부차장 ()
  • 승인 1991.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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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각조건 제시 않아 '비업무용'처분 못해…현대는 아파트 분양 강행 움직임

  매각 압력을 받고 있는 서울 성동구 구의동 5백46번지 현대건설 소유의 '비업무용'땅. 2만6천6백여평의 아파트 부지인 이땅은 북쪽 강변도로를 끼고 동쪽으로 올림픽 대교에서 서쪽으론 강변역까지 길쭉이 누워 있다. 아파트가 들어선다면 한강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최상의 단지가 될 것이 틀림없다. 강변역쪽의 부지에는 분당 8차아파트 모델하우스가 건축중에 있다. 한 곳에는 모래 자갈 등 골재가 수북이 쌓여 있고 철근 H빔 목재 시멘트 등 갖가지 건축자재들이 야적돼 있다. 길 하나 건너 아파트 건설현장에 들여가는 자재들이다.

 다시금 이땅이 세간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의 압력에 못 이겨 성업공사에 매각을 의뢰했던 현대가 아파트 분양을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측은 '원래 6월중에 분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매각 위임된 상태이기 때문에 별도의 능동적인 조처를 취할 입장이다. 구의동 땅은 우리 손을 떠나 성업공사의 처분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는 성업공사에 매각을 위임하기 3일전인 지난 5월4일 성동구청에 주택사업 승인신청을 냈다.

  사업승인이 나면 매각 위임을 해지하고 아파트 분양을 강행하려는 속셈이다. 가히 '밀어붙이기'의 명수 현대가 아니고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배짱이요, 발상이라 할만하다. 더군다나 추상같은 정부의 의지가 담긴 '5·8 조치'에 따라 비업무용 땅의 매각을 강요하는 정부와 안 팔고 버티려는 재벌과의 팽팽한 힘겨루기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돼 있는 터다. 이런 마당에 '비업무용'으로 판정난 땅에 대해 아파트 분양을 강행하려는 현대의 기도는 분명 정부에 대한 도발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의 아파트 분양이 이루어질 경우 성업공사에 매각 위임된 다른 기업의 비업무용 땅들에 대해서도 위임자가 계약을 해지·처분할 수 있는 전례가 된다. 지난해 정부의 '5·8 재벌 부동산 매각 조치'에 따라 기업들이 성업공사에 매각 위임한 토지는 2천4백만명인데 이중 팔린 땅은 23만여평에 불과한 실정이다.

  현대로부터 사업승인신청서를 접수한 성동구청은 사안의 미묘한 때문에 자체적으로 결정을 할 수 없어 서울시에 질의서를 제출해놓고 있는 상태다. 구청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비업무용 땅인지 모르고 사업승인 신청을 받았다. 나중에 현대가 성업공사에 이땅의 매각을 위임한 사실을 알고 현대측에 따졌더니 여신규제를 받지 않기 위해서 매각 위임했다는 것이었다."그는 규정상 사업승인을 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나 구청에서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사안"이므로 5월18일 서울시에 질의서를 냈다는 것이다.

  성업공사측은 서울시에서 사업승인을 해주면 현대에서 매각 위임에 관한 계약 철회를 요청할텐데, 그 경우 계약 해지를 안 할도리가 없다고 밝힌다. 한 관계자는 '매각 위임된 비업무용 땅을 소유자가 자체 처분 하려면 사전에 성업공사와 협의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 압류재산이나 불법재산이 아닌 한 위임업무를 행하는 성업공사가 강제 매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왜 일단 매각 위임된 토지를 팔려고 내놓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현대측에서 매각금액 수납방법 할부기간 분할매각 등에 관한 매각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또 “말썽의 소지가 있는"사안이므로 서울시의 사업승인 여부를 본 후에 생각할 문제라는 것이다.

  은행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5·8 조치가 투기 목적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처분하라는 것이지 아파트 지어 파는 것까지 그 조치의 대상으로 하느냐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또 그는 구의동 당은 다른 비업무용 토지와는 다른 경우로 '분양도 일종의 매각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현대가 구의동 땅에 아파트를 건축·분양하기 위해서는 서울시의 사업승인과는 별도로 주거래 은행인 외환은행에서 부동산 취득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를 어기면 부동산 취득가액에 해당하는 대출금에 대해서 연간 19%의 연체이자율이 적용되고, 지급보증 요요율이 현재 최고 요율 1.5%의 1.5배가 적용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현대가 이런 제재를 무시하고 분당을 강행할 경우에 대해 은행감독원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비업무용 땅의 매각을 독려할 입장인 은행감독원이 실제로는 그런 의지도 대비책도 없는 것 같다.

해당 관청, 책임 안 지려고 발뺌만
  이제 공은 서울시로 넘어갔다. 관련 당국이나 기관들이 서울시의 사업승인 여부를 지켜볼 뿐 지금으로선 할 일이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 관계자의 대답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김창배 주택국장은 “질의서를 받지 못해 내용을 모르겠다. 현대의 구의동 땅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질의서가 오면 검토되겠지만 과장전결사항이다"라고 말했다. 밑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투다. 현대의 아파트 분양 강행 기도와 관련, 해당 관청이나 기관들은 책임을 안 지려고 발뺌하기에 바쁜 실정인 것이다.

  그러면 재벌들이 매각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성업공사는 매각을 위임받은 비업무용 땅을 언제까지라도 처분할 수 없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행 규정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많다. 은행감독원 관계자는 “비업무용 땅을 파는 것은 성업공사의 일이다. 성업공사의 규약상 일정 기간내 매각조건을 협의하게 돼 있는 줄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업공사 관계자는 상반되는 말은 한다. ”그런 규약이 없다. 성업공사의 부동산 처분 기준이란 은행감독원의 지침에 따르는 것 아닌가. 매각을 강제할 수 있는 독자적인 규약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최대한 빨리 처분하려고 한다." 여기서도 두 기관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벌들은 바로 이점을 노린 것이다. 성업공사에 매각을 위임하고 매각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성업공사가 이를 처분할 수 없게 돼 있다. 게다가 성업공사에 위임돈 비업무용 부동산은 정부가 매각으로 간주하므로 위임자는 여신규제를 받지 않는다. 재벌은 정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땅을 내놓는 척하면서 실은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업공사는 재벌 땅의 피난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 말고 다른 재벌들도 대부분 비업무용 땅의 매각을 위임만 했을 뿐 매각조건을 제시하지 않아 이같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한 관계자는 귀띔했다.

성업공사는 비업무용 땅 '피난처'
  현대 소유의 구 서울고등학교 부지가 서울시에 의해 '일방적으로'공원용지로 고시됨에 따라 현대는 구의동 매립지 5만여평을 대신 받았다. 현대가 이땅을 서울시로부터 등기 이전한 것은 86년 3월 4개 단지 중 말썽이 되고 있는 땅은 제1단지다. 4단지 5백81세대는 89년 4월, 3단지 1천56세대는 지난해 10월 입주했고, 2단지 1천6백6세대는 90년말 착공해 현재 공사가 진행중이다.

  현시세로 평당 5백~6백만원을 호가하는 1단지에는 32·51·64·77평 아파트 2천1백60세대를 지어 분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땅은 지난 3월 국세청으로부터 '비업무용'판정을 받았다. 땅을 소유한 날짜로부터 5년 이내에 소유권 이전이 안됐기 때문이다. 당시 은행감독원은 이 땅에 대한 비업무용 판정이 적절치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현대의 한 간부는 “건축심의와 사업승인의 지연으로 사업시행이 늦어진 것이다. 그러나 정부시책에 부응하기 위해 성업공사에 매각을 의뢰했다"고 말한다. 한편 건설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현대의 아파트 건축이 늦어진 것은 층수를 15층에서 30층으로 높이고 평수를 크게 늘리는 등 원래의 건축계획을 수정하기 위해 당국과 실랑이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땅값이 계속 뛰므로 분양가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분양을 지연시켰다는 시각도 있다. 현대측은 '소유권이 바뀐다 해도 이땅은 어차피 아파트 건축부지다. 사업승인이 빨리 나와 분양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주택난 해소에도 기여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현대측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현대의 분양 강행이 법률에 저촉될 것도 없다. 그러나 정부의 '5·8 조치'는 법 조문을 따지는 선을 넘어 통치권 차원의 비상 조처라고 할 만하다. 땅투기에 대해 비등하는 국민의 불만을 등에 업고 재벌의 도덕성에 초점을 맞췄던 고단위 처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확인한 대로 겉으로 서슬 푸른 정부의 '초강경카드'가 실제는 속빈 강정임을 알 수 있다. 정부의 위세 앞에 일반 국민이나 주눅 들지 정작 당사자인 재벌들은 땅을 안전한 '금고'에 넣어뒀다가 분위기가 누그러지면서 다시 꺼내 쓸 수 있게끔 현행 제도는 돼 있다. 당국자들의 큰소리는 정녕 허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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