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부수 확인 '새 질서'찾아야
  • 이중한 (서울신문논설위원·출판평론가) ()
  • 승인 1991.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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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지의 쟁점은 기실 해묵은 것이다. 5년여 전 저작권법을 개정하고 있을 때에도 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야기할 것이 없을 만큼 논의를 했었다. 이번에는 베스트셀러인 《태백산맥》과 '한길사'라는 눈에 띄는 출판사가 부딪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호기심을 끄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때와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인지문제가 이번에 결론을 얻게 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선 법적으로 인지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저작자와 출판사간의 계약은 개별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므로 당사자간에 인지첨부를 유보할 수도 있고 또 이미 계약에 의해 인지를 붙이지 않고 나온 책들도 많다. 결국 인지제도란 법에 의해서라기보다 현실의 관행이 만들어내는 제도이다.

  인지제도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저작권 사용자, 즉 출판사쪽에서 보면 인지란 제책과정의 작업만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서구를 보라, 어디에 인지를 붙이는 책이 있는가"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논지에는 우리 사회 현실이 과연 신용사회로서의 확고한 구조가 성립돼 있는가 하는 전제가 빠져 있다. 미국과 같은 경우 인지제도는 없지만 그러나 어느 거점에서도 책의 발행부수를 쉽게 확인해낼 수 있는 조직적인 세무행정 구조가 있다. 제지 용지 유통 제책사 서점 우편판매과정 등 어디로서나 책의 부수는 사실대로 기록되고 또한 확인된다. 우리처럼 "베스트셀러 순위가 조작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 같은 것이 아예 제기될 여지가 없을 만큼 거래의 신용이 확립돼 있다.

  이렇지 않은 상황에선 저작자가 믿을 수 있는 것이 인지밖에 없게 되는데, 이 역시 인지보다는 출판사들의 신용적 관행에 열쇠가 있다. 책이 좀 팔릴 때 저자 몰래 일부의 부수를 더 찍어 파는 태도를 출판계 전반에서 그럴 수도 있다라고 보느냐, 아니면 창피한 일이라고 멸시하느냐 하는 도덕적 관점이 있어야 한다. 아직은 출판사들이 이에 대한 대답을 명백히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부도덕성은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제약회사들은 약의 성분 함량을 표시대로 지키지 않아 자주 적발되고, 가짜 참기름이 진짜 참기름 보다 더 많이 유통되고 있는 사회인 것이다. 더욱이 생명에 대한 양심도 성립돼 있지 않은 터에 인쇄물 같은 거래에 있어 양심이 뭐 그리 중요하냐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용거래가 정착되지 않은 출판계도 결국은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취약성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정보화사회로 가면서 우리도 이제는 바코드제도를 도입하게 될 것이다. 백화점에서는 이미 시작돼 있다. 책에 바코드를 붙이게 되면 실제 거래부수를 확인하는 부분이 커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출판영업 관행 중 매절(출판사와 대형서점·도매상과의 대량 현찰거래) 방법도 새 질서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많이 팔릴 때 출판사가 인지(세)부정의 유혹을 받게 되는 가장 큰 소지가 바로 매절에 있기 때문이다.

  인지란 저작자와 출판사간의 영수증일 뿐이다. 이 영수증이 무의미하게 되도록 우리 사회의 양심과 신용도가 전반적으로 개선될 때 인지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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