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몰아낸 에티오피아 ‘민주전선’
  • 파리·진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1.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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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상태 우려한 미국 지원받아···민족갈등·에리트레아 독립 등 난제 산적

 14년간 에티오피아에 군림해온 독재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마침내 국외로 도주하고, 중심을 잃은 정부군이 붕괴상태에 빠지자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무혈 점령하고 임시정부를 세운 반군의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마디로 멩기스투가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멜레스 제나위(36) 등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의 지도자들도 공산주의자들이다. 최근에 와서는 서구식 미주주의에 대해서도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지만, 얼마전만 해도 고르바초프 노선을 배격하며 알바니아 노선을 지지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자처해왔다.

 그렇다면 5월 말에 런던에서 열린 휴전협상 때 미국이 선뜻 반군의 수도 장악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아프리카에 대한 소련의 입김이 강하던 냉전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상한 이야기다.

 그러나 아프리카 사정에 대처함에 있어서 미국이 이처럼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현실에 맞는 실질적인 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 사실이며, 그것은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실감케 해준다.

 미국은 멩기스투가 지난 4월21일 짐바브웨로 망명하기 훨씬 전부터 그에게 휴전에 동의할 것, 임시 거국정부를 세운 다음 선거를 실시할 것 등에 동의하도록 권해왔다. 동시에 미국은 민주전선쪽에도 비슷한 권유를 해왔다.

행정 맡은 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조처
 그러나 정부군의 지휘계통이 무너지자 아디스아바바가 무정부 상태에 빠져 얼마 전에 라이베리아에서 정부가 무너졌을 때처럼 유혈 참극이 벌어질 위험성이 보였다. 따라서 미국은 휴전협상을 포기하고 반군의 수도 점령계획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미국은 에티오피아의 국경과 영토 보존을 지지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뒤집고 1962년에 에티오피아에 합병된 에리트레아의 독립여부를 국민투표에 회부하는데 동의를 표시했다.

 반군이 수도에 진주한 지 이틀만에 수천 명의 수도 시민들이 반미시위를 벌인 것은 이 때문이다. 첫째, 여러 민족이 모인 거국적인 임시정부가 들어서지 않고 티그레족이 주축인 민주전선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불만이라는 것이다. 수도의 주민들 대다수는 암하라족이며, 이들은 전통적으로 티그레족을 열등한 민족이라며 천시해왔다. 둘째, 에리트레아는 홍해에 면한 지방으로 에티오피아로서는 내놓을 수 없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2천명 이상의 시위자들이 반미 구호를 외치며 미국 대사관에 몰려들기도 했다. 시위가 일부 난폭해지자 군인들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생겼다. 이틀 동안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적어도 2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도 있으며, 사망자 수가 실제로는 훨씬 적다는 보도도 있다.

 에리트레아 문제 때문에 30년 전부터 내전에 참가해온 주요 반군그룹은 민주전선외에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에리트레아 민족해방전선으로 최근 정부군 붕괴에 따라 에리트레아 전역을 장악했다. 또 하나는 오로모해방전선으로 이들도 일부 남부지역의 자치를 요구하고 있다.

 현재 민주전선이 임시로 정부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조처이다. 한달 후에는 여러 세력이 모여 과도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원탁협상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한편, 현지에서 4개월간 반군의 활동상황을 취재하고 돌아온 영국 주간신문《옵서버》특파원의 보도에 따르면, 민주전선은 국민들의 직접 참여에 의한 ‘혁명적 민주주의’를 제창하고 있으며, 다당제 민주주의 제도의 수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정강으로 삼고 있다. 이 특파원은 민주전선의 지도자 멜레스 제나위는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만약 사회주의가 민주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우리는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옵서버》 보도에 따르면,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대에서는 이미 선거를 통해 지방자치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해왔다. 미국이 민주전선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힘의 공백을 급히 메워야 되겠는데 달리 대안이 없었다는 현실적인 이유만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간 반군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앞으로 이들에게 원조를 제공하면서 민주주의 방향으로 유도해 간다면 따라올 소지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미국이 품게 되었을 수도 있다.

반군 지도자 신중 온건. 시민 반응 좋아
 아닌게 아니라, 아프리카에는 독재자의 압정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으며, 그러한 정치상황 때문에 경제적 후진성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에도 지장이 있다는 견해가 유럽에서는 종종 피력되고 있다.

 그러나 독재자를 밀어내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에티오피아의 경우도 에리트레아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소수민족의 독립이냐, 대동 통합이냐, 또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 앞으로 과연 민주적 정치가 잘 가꿔져나갈 것인가도 큰 문제이다.

 임시로 행정권을 담당하고 있는 반군 지도자들의 언동은 신중하고 온건한 편이어서 시민들 반응은 나쁘지 않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6월4일에는 시내 탄약고에서 사보타지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대폭발 사건이 터져 수십 명의 사망자와 1천명 이상의 부상자가 생김으로써 수도의 민심 안정에 큰 지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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