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최 (연세대교수 신문학) ()
  • 승인 1990.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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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트는 독일의 현대사”

빌리 브란트《회고록》 프로필랜출판사 펴냄
 지난해 정월 서독의 수도 본에서 참으로 감동적인 생일잔치가 벌어졌다. 연방공화국의 국가원수가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명예 당수 빌리 브란트의 75회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유럽의 전 · 현직 정부수반 10여명을 포함한 30여명의 빈객들을 대통령 관저에 초청하여 오찬을 베풀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바이츠제커 서독대통령은 “훌륭한 성공, 괴로운 역퇴전, 새지평에의 도전 등 실존의 위험과 모험에 가득찬 빌리 브란트의 생애는 곧 20세기 독일의 운명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브란트의 사사로운 ‘전기’가 바로 독일의 ‘현대사’가 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57년 브란트는 독일 전후사의 숙명을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분단도시 베를린의 시장이 된 이래, 유럽 최대 정당의 최장수 당수, 서독 외무부장관, 전후 최초의 사민당 총리,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의장 등 국제정치의 각광을 받는 무대에서 언제나 주역의 한사람으로 활동해왔다. 동시에 그는 그러한 ‘정치활동’ 속에 그저 몰입하고만 있지 않고 기회있을 때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기 행적을 기록하는 ‘저술활동’을 병행해왔다. 그의 정치적 이력의 여러 매듭에는 하나의 이정표로서 언제나 한권 이상의 저서가 뒤따랐다. 가령 북유럽 망명시절에 관해서는《밖에서》란 저서를, 베를린 시절에 관해서는《베를린으로 가는 나의 길》이란 저서를 내놓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총리직(1969~1974)을 그만 둔 뒤에도 그 시기를 회고한 두권의 두꺼운 책이 이미 나온 바 있었다.《오늘을넘어서 : 중간결산》《해후와 통찰 : 1960~1975》가 그것이다.

 작년 9월 출판되자마자 곧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른 이번《회고록》은 과거의 저서와는 달리 브란트의 정치적 활동의 어느 한 특정시기가 아니라 기구한 출생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그의 전 생애를 75세의 노정객 입장에 어울리는 ‘전망의 거리’에서 담담하게 서술한 자기완결적인 자서전이다. 게다가 과거의 저서들이 분주한 관직 · 당직의 여가를 틈타 ‘부업’으로 집필한 부산물인데 비해서 이번《회고록》은 64년부터 장장 23년 동안이나 그가 고삐를 쥐고 있던 사민당 당수직을 87년에 사임한 뒤 만 1년반동안 집필을 ‘본업’으로 삼고 집중적으로 저술한 소산이라고 브란트 스스로 술회하고 있다.

 75년이란 짧지 않은 생애를 전 국면에 걸쳐 회상하고 있는 이 책은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서 현재로 직선적인 화살표 방향으로 기술되지는 않고 마치 영화의 몽타주 기법처럼 과거와 현재가 자유롭게 교차하면서 얘기가 엮어지고 있다.《회고록》의 제1장은 ‘자유에로의 귀향’이라는 제목밑에 그가 시장시절에 조우한 베를린장벽의 구축사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회고록의 마지막 부문에서 그는 “그럼 베를린은? 그리고 장벽은? 베를린은 살 것이다. 장벽은 무너질 것이다”라고 다짐함으로써 다시 베를린 문제로 ‘귀향’하고 있다. 작년 11월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기 몇 달 앞서 나온《회고록》의 이 귀절은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 동베를린에 이르기까지 어느날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궐기하여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적은 다른 귀절과 함께 브란트의 자서전이 단순히 과거를 돌이켜보는 회상록이 아니라 미래를 꿰뚫어 내다보는 예언서와 같은 무게를 갖는 책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긴다. 이 귀절들은 그 뒤 널리 인용되고 있다.

 동유럽의 혁명적 변화 이후 거론되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르네상스는 브란트의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르네상스와 무관하지 않고 그것은 다시 이《회고록》의 출판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이자 동시에 문필가인 브란트는 말하자면 국제정치무대의 大主役이자 동시에 大記者라고 할 수 있다. 연기자이면서 관찰자요 비평가인 그는 ‘행동의 사람’에 못지 않게 ‘언어의 사람’이기도 하다. 언어(로고스)는 곧 이성(로고스)이다. 브란트의 정치적 실천과 일관해서 동반하고 있는 언어, 바로 그의 실천적 이성이란 무엇인가? 평화에의 의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화에의 의지가 다른 어는 곳에서 보다도 긴요하게 요구되고 있는 곳이 남북분단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해야 될 우리의 한반도이다. 브란트의《회고록》이 어서 우리말로 옮겨져 널리 읽혔으면 하는 소원이 그래서 간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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