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침투 ‘비밀 문’ 열쇠꾸러미 찾았다.
  • 파리 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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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두 연구팀, 관련 분자구조 잇달아 밝혀내

금세기의 천형이라 일컬어지는 에이즈를 정복할 날도 멀지 않았는가. 지난 10월말 파리 교외 마른느 라코케트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는 20세기 의학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라고 여겨져온 에이즈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리라 평가되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인정받고 있는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의 아라 호바네시안 교수팀이 발표한 이 논문은, 인체의 면역기제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분자구조를 밝혀내 학회 참석자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지난 83년 처음 에이즈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잠복 상태인 에이즈 바이러스가 어떤 경롤 병을 전염하는지는 극히 부분적으로만 밝혀졌을 뿐이다. 84년께 백혈구의 표면에 특수한 분자(CD4)가 있어 에이즈 바이러스와의 충돌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 유일한 성과이다. 그러나 그후 계속된 연구 결과 CD4가 에이즈 바이러스로 하여금 백혈구 속으로 침투할 수 있도록 하는 출입문 역할을 하기는 하나, 이 관문을 거쳤다고 해서 반드시 에이즈가 발병하는 것은 아님이 밝혀졌다. 따라서 85년 이후의 연구는 CD4를 제외한 제2의 출입문을 찾아내는 데로 집중되어 왔다.

CD26 항체 구실할 의약품 개발 기대
 호바네시안 교수팀이 이번에 새로이 발견한 이 ‘제2의 출입문’ 은 CD26이라고 불리는 분자구조로서 효소 학자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존재이다. 그러나 이CD26과 에이즈 바이러스와의 상관관계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호바네시안 교수는 “백혈구를 선박이라 할 때 CD4분자는 선박을 정착시키는 닻이며, CD26분자는 에이즈 바이러스라는 화물을 정박해 있는 선박으로 옮겨놓는 기중기와 같다”라고 비유한다. CD4나 CD26중 어느 한가지만 작동해서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백혈구속에 침투해 서서히 면역기제를 하괴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에이즈 바이러스라는 불가사의를 풀 수 있는 열쇠꾸러미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를 받은 호바네시안 교수팀은의 연구는 에이즈 예방 및 치료제 개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CD26의 활동을 억제하는 물질, 혹은 CD26분자의 항체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의약품을 개발함으로써 에이즈를 극복해 나갈수 있으리라고 호바네시안 교수는 본다.

현재로서는 90년부터 시판되기 시작한 AZT와 DDI등이 근근히 에이즈 보균자들의 발병 시기를 늦추거나 이미 병이 진행중인 환자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약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이 심할 뿐 아니라 값이 비싸 에이즈가 가장 극성을 부리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환자들에게 투여할 엄두도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멀지 않은 장래에 효율 높은 예방 치료약이 개발되기를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작년에 처음으로 발행된 <세계의 에이즈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83년부터 10년간 이미 세계적으로 1백90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했으며, 95년까지 예상되는 사망자 수는 무려 5백만명에 육박한다. 지금까지 비교적 안전지대라고 인식되어 왔던 아시아 대륙에서도 에이즈 보균자 및 환자 수가 급증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10년(에이즈 바이러스의 평균 잠복기간) 뒤를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방 백신 발명이 지상 과제
 더욱이 에이즈가 마약복용자 · 동성연애자등 극히 일부 소외 집단만을 강타하는 천벌처럼 여겨지던 때와는 달리, 해를 거듭할수록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혈액을 수혈받아 병을 얻었거나 이미 사망한 혈우병 환자들의 비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는 이성연애자나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환자층이 다양해짐에 따라 예방백신을 발명해야 한다는 명제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에이즈가 누구나 걸릴수 있는 병이라는 인식이 일반 여론에 자리잡을수록 전문가들은 지극히 신중한 태도를 취해 왔다.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않는 것이 환자를 최대한 존중하는 길”이라는 이들의 비관적인 유보자세가 호바네시안 교수팀의 개가로 전환기를 맞게 될지 두고볼 일이다.

 한편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와 합동 연구를 펼치고 있는 마르세유 북부 병원의 한 연구팀 또한 에이즈 연구를 가속화시킬 만한 성과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호바네시안 교수팀의 실험 결과가 알려진 지 사흘 뒤인 10월 29일 단백질공학 전문가인 반 리트쇼텐 교수가 이끄는 마르세유팀은 기자회견을 통해 에이즈 바이러스의 침입이 가능한 모든 통로를 차단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분자구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반 리트쇼텐 교수는, 이는 시험관 내에서 이루어진 모델 검증이므로 실제 임상 치료에서는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두고봐야 한다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여하튼 10년 전부터 숱한 추측과 소문으로 현대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켜 온 20세기의 괴질 에이즈의 정체가 차츰 멋겨진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파리 ● 梁永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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