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촌지…촌지…여전히 ‘악취’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1.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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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출입기자단 간사, 거액 수수 말썽…언론사·업체·일부 기자 ‘합작품’

 한국기자협회는 6월7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노동부 출입기자단 간사인 <연합통신>蔡모 지가(44)에게 회원재명조처를 내렸다. 제명 이유는 △기자단 간사 직책에 있으면서 업계로부터 거액의 촌지를 받아 유용했으며 △기자단의 공금을 유용함으로써 전체 언론인의 명예와 품위를 실추시켰고 △일벌백계가 불가피하다는 언론계 안팎의 여론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채기자는 노동부 동료기자들에 의해 출입기자단에서도 제명됐다.

채기자는 4월23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북경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노동장관회의에 노동부 출입기자 4명과 함께 참석했다. 그런데 출국 전 몇몇 대기업으로부터 협찬금 명목으로 모두 1천여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채기자 사건’은 시작됐다.

 왕복항공비는 해당 언론사가, 채재비는 노동부가 부담하기로 했지만 채기자는 대기업을 돌며 ‘바깥에 나간다는 통보’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연히 돈뭉치가 전달됐다.

 이밖에도 채기자는 노동부 출입기자단의 공금 3백만원을 개인적으로 유용했고 장관으로부터 “남아 있는 기자들 선물이나 마련하라”는 명복으로 1천달러를 받았다. 노동부 기자단 공금은 출입처 촌지를 거부하는 몇몇 기자의 몫을 적립해두었던 것이서, 이번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을 더욱 아연케했다. 귀국 후 노동부기자실 동료기자들에게 건네진 선물은 고작 볼펜 한 자루였다.

기업체와 ‘직거래’ 후 차등분배
 원래 촌지 수수는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면 은폐되게 마련이다. 더욱이 간사가 촌지를 공정하게만 분배한다면 당사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채기자는 기자단의 해외취재 명분을 내세워 촌지를 긁어모아 동행기자들에게 차등분배함으로써 ‘은폐’에 실패했다. ‘뭔가 덜 받았다’고 느낀 동행기자의 입을 통해 문제가 확대된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동행기자 4명은 김포공항과 홍콩공항에서 채기자로부터 아무런 설명없이 약 6백6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기자단 공금 3백만원과 장관 촌지 약 70만원을 합해도 차액이 2백90만원이나 된다. 만약 채기자가 업체에서 돈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동료기자들에게 ‘한턱’ 쓴 셈이 된다.

 노동부기자단은 진상을 밝히고 새로운 간사선출을 논의하기 위해 5월24일 첫 회의를 소집했다. 사태수습을 위한 이 회의에서 오히려 문제는 더 크게 확대됐다. 채기자는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채 전화로 “국제노동기구(ILO)회의만 참석하고 간사직을 물러나겠다. 공금은 별 생각없이 사용했다. 채워넣겠다”고 태연히 통보해와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기분이 상한 기자들은 자연스럽게 채기자에 대한 개인적 불만을 털어놓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 동안의 행적이 낱낱이 드러나 제명조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채선배는 노동부기자단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문율을 정면으로 깨뜨렸습니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모 일간지 기자의 말이다. 그 불문율이란 “기업체와 직거래는 하지 않는다”는 것과 “기사와 관련된 촌지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불미스런 일을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간사의 임기를 6개월로 제한했는데 채기자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이미 8개월째 간사직을 맡고 있었다.

 채기자는 이 불문율을 깼을 뿐더러 모 재벌기업 관계자와의 점심약속 등에 몇몇 언론사 기자들을 일부러 제외시켜, 결국 특정기자를 ‘물먹이는’ 행동을 해왔다는 게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됐다.

 이 사실이 기자협회 등 몇몇 언론단체에 알려지자 채기자는 5월28일 두번째 열린 노동부기자단 회의에 나와 제명철회를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채기자는 “대우 포철 현대로부터 모두 1천만원을 받았지만 그들이 자진해서 갖다준 것이다. 그 봉투에는 ‘祝 長途’라고 쓰여 있었다”면서 “이미 그들과 없었던 일로 합의했으니 제명을 철회하고 문제를 덮어두자”고 말했다고 한다. 동료기자들을 더욱 격앙시킨 것은 “나는 이미 다칠 만큼 다쳤기 때문에 이전투구를 벌일 수도 있다”라며 ‘물귀신 작전’을 펴 문제가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자 했다는 점이다.

 촌지 수수와 관련하여 기자는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전혀 안 받는 경우, 주는 것만 받는 경우, 촌지가 나올 만한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 ‘콜’(돈을 요구하는 것)하는 경우이다. 흔히 기사들 사이에서는 세번째 유형을 ‘舊惡’이라고 부른다.

 “사실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성의 빛은 전혀 안 보이고 오히려 큰 소리를 쳐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채선배가 구악이었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알았습니다.”동료기자의 말이다. 그동안 기자협회와 언론노련에 보도자제를 요구하던 조동부기자단도 결국 손을 들었고, <언론노보> <한겨레신문> <기자협회보>에 잇따라 ‘채기자 사건’이 실리게 돼 이 촌지 추문을 세상이 다 알게 되었다. 노동부기자단 전체가 심한 정신적 피해를 입은 건 물론이다. 노동부기자단은 이번 사건을 심기일전의 기회로 삼아 불문율을 명문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촌지관행은 노동부에만 있는게 아니다. 소위 ‘물 좋은’다른 부서는 노동부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게 일선기자들의 견해이다. “노동부나 되니까 이런 문제가 터져나왔지 다른 데라면 거론조차 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자협회 朴仁奎 편집국장의 말은 기자단 부패의 심각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기자단 촌지가 말썽을 빚은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수서특혜 의혹이 한 꺼풀씩 벗겨지던 올 2월말, 검찰은 ‘수서관련 언론인 수사’를 슬쩍 흘렸었다. 한보그룹이 뿌린 촌지에서 완벽하게 제외된 <세계일보>가 수서사건을 터뜨린 후 불붙은 보도경쟁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언론플레이’라는 분석이 뒤따랐지만, 언론계의 수서 촌지 추문은 덮어지지 않았다. (《시사저널》제73호 참조). 이 추문에 휘말린 서울시청 출입기자단은 언론계 내부에서 '집중포화‘를 당했고 상당수 출입기자들이 바뀌었다.

기자 64.9% 기자단 해체 찬성
 수사관련 언론인 수사는 흐지부지 끝났지만 차제에 언론정화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언론계 안팎에서 높아졌다(언론자정에 관한 기자들의 의식구조는 아래 표 참조). <동아일보>는 기자윤리강령을 채택, 언론자정의 가능성에 한발 접근하기도 했다. 또한 수서이후 각 출입기자단은 출입처가 비용을 부담하는 해외취재를 자제해왔다. 이런 와중에 ‘채기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기자의 양심뿐만 아니라 취재비의 대부분을 출입처에 떠넘기는 언론사의 관행도 큰 문제로 떠올랐다. 언론사가 취재비를 부담하지 않는 한 기자는 자연히 출입처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동아일보>에서 윤리강령을 제정할 때 취재비용 부담문제로 노사간에 진통을 겪었는데, 이는 출입기자단 문제에 대한 언론사 경영진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었다.

 彭元順(한양대·신문방송학)교수는 “부패척결에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부패를 저지르면서 마치 기득권을 누리는 것처럼 행동하는게 우리언론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진단하면서 “언론과 촌지의 뿌리깊은 사슬을 끊으려면 기자단을 해체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언론노련이 지난 5월 기자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64.9%가 기자단 해체에 찬성한 반면 33%가 기자단 존치를 주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선기자들 사이에선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워낙 뿌리깊은 관행이라 당장에 출입기자단을 없애기보다는 각 언론사가 윤리강령을 채택하는 방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촌지관행을 정당화하는 논리 중의 하나가 “거부하면 취재원으로부터 따돌림당한다”는 ‘적응의 논리“이다. 다 받는데 혼자만 안 받겠다고 버티려면 일정 기간 취재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게 현실이다. 촌지를 거부하고 있다는 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언론사가 기자윤리강령을 만들어 기자에게 촌지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만 이라도 제공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촌지를 거부하려면 최소한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연합통신>은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물어 패기자를 내근부서인 지방부로 전보발령했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정확한 진상규명을 통해 적절한 인책을 함으로써 파문을 수습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의원 뇌물외유사건 때 ‘공돈 노리는 선량들’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늦추지 않았던 언론이 자신의 치부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대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제4부라 불리는 언론의 비리는 누가 감시해야 되고, 촌지 수수 관행은 언제 없어질 것인가. 불공정보도 시비와 함께 이문제는 한국언론이 풀어야 할 최대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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