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민족문제의 뿌리는 역사적 상처
  • 본ㆍ김호균 통신원 ()
  • 승인 1990.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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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갈등, 강제합병 등으로 ‘불안 잉태’ … 고르바초프 실각 점치는 것은 ‘시기상조’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확대일로를 치닫던 소련 남부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사이의 내전이 중앙정부군의 개입으로 일단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저항이 장기화 될 것으로 보여 제2의 아프가니스탄 사태화 할 우려를 낳고 있다. 소련이 연방 사상 처음으로 한 연방공화국의 수도(바쿠)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및 이란내의 자기 동족과의 통일을 주장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전선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하고 이란으로 도피해서 살상을 계속하고 있다. 세계에서 오직 이란만이 종교적인 이유로 소련중앙정부의 무력진압을 비판하고 나섰고 또 소련영토에서 이란 경찰이 목격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나아가서 아르메니아 공화국내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자치구인 나히체반이 연방탈퇴를 선언하고 이란에 협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차별정책이 도화선   

 아르메니아 민족과 아제르바이잔 민족 사이의 분규는 표면적으로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속해 있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구의 귀속문제를 둘러싼 것이다. 소련연방에는 현재 15개의 연방공화국, 20개의 자치공화국, 8개의 자치구, 10개의 민족자치구가 있는데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각각 연방공화국이며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속해 있는 아르메니아족의 자치구이다.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정부가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경제개발에 인색할 뿐더러 학교내에서 아르메니아 역사수업을 금지하는 등 민족차별정책을 추진한 데 대해 평소부터 불만을 품고 있던 나고르노 카라바흐 주민의 80%를 차지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88년 들어 매일 시위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89년에 들어와 연방정부는 민족분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연방정부 직속의 임시행정위원회를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두 공화국정부의 협력을 받아 점차적인 타협점을 찾아갔다. 그러다가 4월말에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페레스트로이카에 입각한 기업연합을 수립하는 경제개혁 문제로 위원회의 노력은 다시 좌초하게 되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소수인 아제르바이잔인들은 기업연합의 의사결정기구에서 자신들이 소수가 되는 것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복속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의 직접귀속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어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아제르바이잔인들만을 위한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하자 나고르노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인들이 5월에 파업에 들어갔다.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자기민족들이 굶주린다는 소문이 두 공화국에 나돌자 각 공화국은 자기 민족만을 지원하는 이기심을 보임으로써 사태를 계속 악화시켰으며 투석전, 경제봉쇄, 유혈충돌로 계속 확대되었던 것이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9월말 연방공화국과 자치구 사이의 분쟁은 연방정부의 중재에 따른다는 새 헌법조항을 제안하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즉각적으로 ‘주권침해’라고 반박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법률에 저촉되는 연방법률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연방정부의 새로운 헌법조항 제안은 물론 임시행정위원회도 거부하기에 이른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직접 귀속시키는 소위 ‘정상화 계획’을 발표했으나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이를 거부했다. 뒤이어 아르메니아 공화국이 90년도 예산안에 나고르노 카라바흐도 편입하고 자치구내 아르메니아인들의 공화국 선거권을 인정하자 두 민족사이의 분쟁은 90년 1월 들어 폭발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고 양쪽 모두 ‘사생결단’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회교의 해묵은 싸움

두 공화국 사이의 분쟁이 대화를 통한 타협에 이르지 못하고 내전으로까지 치달은 이유로서는 우선 분쟁이 시작되면서 발생한 피난민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높은 인구증가율로 인해 이 지역에서는 평소에도 잠재적 실업자가 늘어났기 때문에 안정된 직장과 주택을 확보하지 못한 피난민들(약 40만명)은 모든 시위와 파업에 참가해서 선동에 앞장섰거나 극렬분자들의 지지자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대중 설득에 나설 만한 유력인사들은 사태가 악화될수록 ‘민족반역자’가 안되기 위해서 비협조적 자세를 보이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선동에 나섰기 때문에 두 공화국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나아가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종교적 반목은 분쟁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아르메니아 민족은 기독교를, 아제르바이잔민족은 회교를 신봉하여 두 민족은 이미 1918~20년 사이에 주민의 20%가 희생될 정도로 치열한 전쟁을 벌인 바 있다.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무기 제공하는 이란 

이란에서 회교혁명이 성공한 후 광신적인 회교세력은 이 혁명을 수출하고자 소련내 아제르바이잔인들에 대한 선동을 계속했다. 작년 6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을 방문한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은 소련에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에 만족을 표시하면서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원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과격파 회교세력은 이에 불만을 품었으며 계속 종교전쟁을 주장했던 것인데 최근에 두 공화국 사이에 유혈충돌이 격화되자 이란은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무기를 제공해준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동안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제반 정책이 부족했거나 너무 안이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되고 있다. 제정러시아 시대에 지배귀족은 통치전략으로서 민족분열을 조장했었다. 혁명후 소련이 모든 민족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수준을 상향적으로 균등화시킨 것은 민족정책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특히 스탈린 치하에서 민족관계의 민주적 원칙을 어기고 민족의 언어 문화를 탄압함으로써 자연스러운 동화과정을 주관적으로 촉진하고 민족구성을 단순화하려 했기 때문에 연방정부는 민족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 오히려 속으로 곪게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끝으로 이 분쟁으로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얻는 세력이 있다는 것도 지적된다. 고르바초프가 배후조종자로 지목하고 있는 “극렬분자, 무책임한 모험주의자, 지하경제의 담당자”란 바로 페레스트로이카 반대세력과 광신적 종교인 등 소련내 ‘마피아’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사이의 분쟁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따라서 그 표현양식도 다르지만 폭발적인 파급가능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 분쟁을 능가할 수도 있는 문제가 바로 발트해 3국의 분리독립운동이다. 특히 리투아니아에서 이 운동이 거세지자 고르바초프가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지난 11일부터 사흘 동안 이 공화국을 방문했지만 그 성과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발트 3국 분리독립 가능성 희박

발트해 3국의 분리독립운동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1940년에 스탈린과 히틀러가 맺은 비밀협정에 의해 3국이 소련에 불법적으로 병합되었다는 점인데 이는 일단 그 자체만으로는 설득력과 명분을 갖는다. 그러나 이 3국의 분리주의자들이 병합 이전의 독립국가로 암암리에 상정하고 있는 국가란 사실 영국의 괴뢰국가였으며 또한 이런 괴뢰국가 이전에는 소비에트 국가였다는 점에서 볼 때 분리독립운동의 역사적인 정당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이들이 분리해나갈 경우 그 여파는 현재 분리독립운동이 일고 있는 그루지야 공화국과 몰다비아 공화국은 물론 다른 민족에게도 확산될 것이며 이들의 운동을 막을 논리적 근거가 없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다. 또한 이들이 분리독립해서 분리주의자들의 요구 대로 친서방국가로 변할 경우 소련의 안보가 직접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이들 공화국에는 토착민족 이외에 다른 민족들이 이미 20~50%가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 3국이 독립한다 해도 민족문제는 물론 영토분쟁까지 새로운 형태로 계속될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이들 3국은 연료 등 원자재를 거의 다른 공화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산품 소비량도 40% 내외를 다른 공화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분리독립을 하게 되면 상당한 어려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발트해 3국 공산당의 분리 움직임에 대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강경대응을 주장하는 데 반해 고르바초프는 “감정을 앞세우면 안된다”면서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3국의 공산당이 지금까지처럼 소련공산당과의 관계에서 지구당의 위치를 유지할 경우 이들이 공화국의회선거에서 참패할 것이라는 예측이 압도적인 시점이니만치 이들의 독립은 이들 자신은 물론, 蘇연방 지도자들에게 최후의 자구책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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