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권력 상속자 ‘청년포럼’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4.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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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전문직 엘리트의 토론모임 확산 … 정보교환 통해 역량 축적



 전문 직업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포럼운동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포럼이라는 말이 ‘광장’이라는 뜻을 담고 있듯이, 이들 포럼은 개방된 토론구조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포럼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개 전문직에 종사하는 젊은 엘리트이고, 이들이 21세기를 대비하는 ‘깨어있는 의식들의 네트워크’를 자임하며 자신들이 책임지게 될 미래를 구체적으로 준비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현재 몇 개의 포럼이 활동하고 있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수십 개라는 사람도 있고, 지방까지 합치면 수백 개는 될 것이라는 이도 있지만, 그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전문가 사회가 왔다”
 포럼 문화를 널리 퍼뜨리는 데 앞장선 곳은 역시 신문로포럼(공동대표 송철원 · 유광언)이다. 93년 9월 창립한 이 모임은 특별한 규정 없이 철저하게 ‘광장’ 구실에 만족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순전히 회원들의 자발성을 토대로 지역별 · 직능별 위원회를 계속 만들어 가고 있다.

 90년 10월 창립한 두라포럼(회장 고명석 민주당 정책전문위원)은 신세대 포럼운동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두라포럼은 ‘각자 전문영역에서 동시대를 주도하는 청년들의 생동하는 네트워크를 통한 공론 형성’을 내걸고 있다.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우며 회원 백여명이 여의도 · 광화문 · 강남 · 과천 등 지역별 포럼에, 혹은 국가전략연구모임 · 시사정책연구모임 ·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모임 · 여성문화연구모임 등 연구분과에 소속해 자유롭게 만나고 토론한다. 회원도 회사원 변호사 공무원 연구원 기자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의 공통된 주제는 ‘21세기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이다.

 두라포럼은 ‘21세기를 주도해 나갈 각국 청년 전문가들 간의 네트워크 만들기’ 라는 차원에서 세계청년포럼(가칭) 결성도 추진하고 있다. 두라포럼측에 따르면 세계청년포럼은 각국의 젊은 전문가들이 세계 혹은 아 · 태지역 내의 공동 과제를 함께 토론함으로써 한국의 국가 전략과 비전을 만들어 내는 마당이 될 것이라고 한다. 두라측은 1차로 일본측 인사들과 올 11월 서울에서 한 · 일 청년 포럼을 갖기로 했다.

 두라는 지난해 11월 한국청년전문가연합회 (회장 홍승의 능곡병원장)와 연합 포럼 모임을 가졌다. 청전연은 93년 6월에 만들어진 모임이다. 이들은 ‘물리적 강제력으로 세상이 움직이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이제 전문가 사회, 정보 축적과 지식 집약의 사회가 왔다’며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전문가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회원 40여명은 거의 40세 이하인데, 교육문화 · 보건의료 · 환경 · 사회경제 · 정치 분과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서린포럼(회장 이영섭 교화산업 대표)은 92년 8월 영국 산업혁명 시대의 지식인 운동이었던 페비언협회를 전범으로 하여 한국적 페비언 운동을 표방하고 결성한 모임이다. 대학교수 · 중소기업인 · 언론인 37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역별 · 계층별 시민운동 조직으로 확산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한반도포럼은 국회의원 보좌관 및 비서관들의 소박한 연구모임이다. 국회의 젊은 비서관들 가운데는 최고급 학력의 엘리트가 많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는 일상 생활에 빠져 자기 계발을 충실히 하지 못하고 있다고 실토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여당의 한 비서관은 “나는 두 가지 목적으로만 국회도서관을 찾는다. 친구 부탁으로 논문 자료를 찾거나, 의원회관의 점심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도서관 식당을 이용할 때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반도포럼은 이같은 자기 정체에서 벗어나고 의정활동에 필요한 다방면의 지식을 얻기 위해 93년 3월 만들어졌고 회원은 16명이다.

 국회 사무처 직원들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공부 모임이 생겨날 것 같다. 사무처의 한 사무관은 “현재 통일 · 법제 등 4개를 상정하여 희망자를 모으고 있다. 다음달쯤 정식 출범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의원들 모임처럼 국회의 지원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컴퓨터통신 이용 ‘온라인 포럼’도 준비중
 (주)KTP는 다른 포럼과 달리 기업 형태이다. 회원 백여명이 약 3백만원씩을 출자하여 아예 회사를 세운 것이다. 이 모임의 김동진 대표는 “우리는 출발할 때부터 결속력이 약한 포럼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강력한 경제 · 정보 공동체를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회원의 자기 계발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이를 수익사업으로 연결하려 한다.

 위에 소개한 몇몇 포럼은 글자 그대로 소수 사례에 불과하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수많은 포럼이 독특한 조직 문화를 유지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이런 모임들이 생겨난 배경에는 87년 6월 민주항쟁을 분수령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라는 동인이 자리잡고 있다. 두라포럼의 고명석 회장은 “80년대의 수직적 · 권위주의적 닫힌 문화가 90년대의 수평적 · 다원적 열린 문화로 바뀌면서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모임 형식이 생겨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근 컴퓨터 통신을 이용한 온라인 포럼을 준비하고 있는 한 모임은, 취지문에서 이 시기를 ‘새로운 문명이 닥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등장하는 급격한 전환기’ 라고 표현하고, 청년 지식인들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목은,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과거의 권위주의가 아닌 정보라는 사실이다. 이같은 시대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지식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정보 네트워크 속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주)KTP의 한 회원은 “정보화 사회에서 네트워크 만들기는 자기 활동의 성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이다. 포럼에 참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포럼은 첫 단계에서는 대개 간단한 공부모임 혹은 정보교환모임 형태로 시작한다. 국회의 한반도포럼도 그런 경우이다. 중소기업인 백여명의 모임인 ‘우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징대씨 (《리크루트》차장)는 “정보화 · 세계화를 떠들지만 실제 우리 사회는 정보 유통 채널이 모두 막혀 잇다. 우리회는 그 속에서 정보의 사랑방 노릇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서린포럼의 총무를 맡고 있는 윤여덕 교수(서강대 · 사회학)는 “우리 사회가 전문화 · 다원화하면서 과거처럼 정당이나 노동조합 경제단체 등 특정 이해집단이 모두의 이해를 대변해줄 수 없게 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자생적 소집단이 생겨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포럼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정치 지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한다. 두라포럼의 한 간부는 “우리는 회원들이 공통의 목표 아래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여론을 형성하고 활동하는 것을 지향한다.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서린포럼의 한 인사는 “우리는 직업 정치인과 종교인의 참가는 사절한다. 모임이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대개의 공 · 사조직이 정치인들에게 ‘이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피해의식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의 한 의원은 “앞으로는 정치인만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사회 각 부문에서 나름대로 정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21세기의 정치 행태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운동과 정치를 칼로 자르듯 구분짓는 것은 무의미한 ‘위선’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중견 되면 엄청난 힘 발휘”
 포럼 문화의 정치적 잠재력은 만만치 않다. 신문로포럼의 이준영 사무차장은 “현재는 초보적인 에너지 축적 단계일 뿐이지만, 포럼을 통해 사회적 훈련을 거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중견이 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포럼운동의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는 이부영 장기표 김근태 이창복 제정구 임채정 등 재야 출신 인사 6인의 포럼인 ‘새시대 광장’이다. 이 모임의 간사인 제정구 의원은 정치권에서는 처음으로 포럼 형식의 모임을 제안하고 실제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의 이야기는 포럼운동의 지평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광복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국민적 합의를 통해 국가 진로를 찾아본 적이 없다. 21세기를 앞두고 모두의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큰 틀이 필요하다. 이 틀을 통해 공통된 시국관을 정립하고, 구체적 정책 대안을 축적하며, 이를 실천할 인적 자원을 양성할 수 있다. 새시대 광장은 그 틀이 형성될 계기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만든 것이다. 5~6년 운영해 보면 뚜렷한 그림이 그려질 테고, 공동 목표를 가진 인적 집단이 만들어지면 궁극적으로 정치 권력까지 창출할 수 있다.” 그는 이런 훈련과 준비 과정을 거침으로써 ‘YS식 개혁’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국가 전략 부재와 인적 자원 부족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비 엘리트의 인맥 만들기’ 시각도
 그러나 새시대 광장은 그같은 이상대로 움직여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미 나름의 정치 기반을 갖고 있는 참가자들 사이에 미묘한 주도권 경쟁이 생겨 포럼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한 관계자는 이를 ‘소아병적 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제의원의 구상만큼은 포럼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의 생각과 상통하는 것이다.

 여당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ㅈ 씨는 “한국 정치는 여전히 양김씨와 그들로부터 지분을 나눠받은 가신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들이 신진 엘리트의 정치권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포럼운동은 이같은 작은 정치를 거부하는 신세대의 대안이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현실적 힘을 얻는다면 그것은 지금의 정치문화 자체를 뒤바꿀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제정구 의원은 “포럼운동은 양김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단언한다. 말로만 양김시대를 부인할 뿐 똑같은 행태를 되풀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포럼운동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교수 출신 한 의원은, 자칫 예비 엘리트들의 인맥 만들기 수준에서 멈출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시민 사회의 토대를 쌓아가기 시작한 포럼 문화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미래가 준비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본다면, 21세기의 한국 정치는 꾸준히 그것을 상속할 준비를 하고 있는 ‘무서운 30대’의 것인지도 모른다.
韓宗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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