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는 핵쓰레기
  • 이흥환 차장대우 ()
  • 승인 1994.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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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일 밤 8시50분. 울진군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고성교 남단에 불길이 치솟았다. 울진군 기성면에 핵쓰레기장을 설치하는 것에 반대하는 일부 주민이 국도 한가운데에 폐타이어를 쌓아놓고 지른 ‘저항’의 불길이다.
 한 시간 뒤 전경 60여 명이 나타나 불을 끄기 시작했다. 진화장구라고 해야 4m짜리 쇠막대기 끝을 구부려 만든 갈퀴가 고작이었다. 불길이 잡히기 시작하자 비로소 차가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교통이 재개되기까지 한 시간 남짓 동안은 말 그대로 마비였다.

 이튿날 아침 울진군은 안정을 되찾았다. 구속자 7명에 대한 처리 문제가 남아 있긴 했지만 ‘주민이 원하지 않으면 폐기장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과기처장관의 공문 한 장(6월1일 4시20분)에 울진군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남은 후보지는 고성 · 양양 · 장흥뿐
 핵쓰레기장 부지 선정을 둘러싼 ‘저항’과 ‘마비’와 ‘제자리 찾기’의 악순환은 울진군에서도 변함 없이 되풀이되었다. 과학기술처와 지역 주민 간의 맞대결이라는 대립 양상도, 경찰력을 해결사로 동원하는 해법도 과거와 똑같았다. 사흘 동안 계속된 울진 사태에 투입된 경찰력은 무려 37개 중대 5천여 명이다. 울진군 경찰서의 자체 전경 수는 1백40명뿐이다. 부산 구미 안동 대구는 물론 경기도에서 차출한 5개 중대도 울진으로 집결했다.

 어쨌든 과기처의 ‘울진 진입’ 시도는 실패했다. 과기처는 한 달 전 장안읍에서도 참패했다. 90년 10월의 안면도 사태는 정부가 부지 선정 방법을 전면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이다. 선정 방법은 바뀌었다. 주민이 원하는 곳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4년이 지나고서도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
 남은 질문은 뻔하다. 다음은 어디냐이다. 지금까지 거론된 예상 후보지 가운데 남은 곳은 강원도 고성과 양양, 전남의 장흥뿐이다. 이곳 주민들의 반발 역시 불을 보듯 뻔하다. 과기처는 안면도 사태 직후인 91년 9월 방사성 폐기물 처분 후보지를 공모한 바 있다(59쪽 상자 기사 참조). 과기처에 따르면, 후보지 자원 지역은 44군데나 된다. 울진 사태까지 겪고 난 뒤 과기처의 반응은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이다. 자원 지역을 1차 대상으로 한다는 방침에 따라 44군데 중 1곳을 선택해 밀어붙이는 방법이 남아 있는 셈이다.

 과기처의 이런 입장은 허풍이 아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가동중인 원자로 아홉 기에서 발생하는 핵쓰레기는 임시로 저장하고 있고, 그나마 임시 저장 시설은 포화 상태에 가깝다(62~63쪽 기사 참고). 문제의 심각성은 또 있다. 내년 6월부터는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한다. 반쪽짜리 지자제가 실시되는 현재도 ‘우리 땅에는 안된다’는 지역 주민의 혐오 시설 기피증이 심각한 마당에, 핵쓰레기장 부지 선정 문제를 내년까지 끌고갔다가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가. 과기처 산하원자력연구소의 부지 선정 연구 용역을 받아 예상 적지 선정 작업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행정력을 갖추지 못한 일개 연구소와 지역 주민의 1 대 1 대립 차원으로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정부 차원에서 직접 개입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또 “힘없는 과기처장관, 연구소의 힘없는 소장이나 박사들더러 지역 주민을 상대하라는 것은 정부의 직무 유기다”라고 못박는다.

 서울대 ㅇ교수는 “비밀 · 밀실 행정이 이런 파국을 가져왔다. 핵쓰레기장뿐만 아니라 처음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당시부터 쉬쉬하고 진행했던 것이 잘못이다. 일부 부지 사전 조사팀은 자동차 번호판을 현지 번호로 바꿔 달고 현지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주민 저항을 염려해서라지만, 결국 주민의 불신만 키워놓은 꼴이 되었다”라고 지적한다.

유치 찬성 주민은 모두 피신
 핵쓰레기장 입지 선정 작업은 과기처 소관이다. 과기처의 원자력개발과가 행정을 담당한다. 입지 선정 과정만 보면 지극히 민주적이다. 후보 지역 시장 · 도지사 의견 청취→관련 부처(내무부 · 건설부 등)와 협의→해당 지역 주민 의견 청취→신문 공고 및 공청회→지역협의회→시장 · 도지사 결정→원자력위원회 심의 · 지정 고시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과연 현지 사정도 그럴까. 환경운동 단체나 현지의 유치 반대 단체들의 주장은 전혀 다르다.

 “원자력연구소에서 외국 핵쓰레기장 시찰단(33명)을 만들어 일부 주민에게 해외여행을 시켜 주었다. 4월 말에는 주민 60명을 선착순으로 받아 대덕연구단지를 시찰시켰고, 포항 ㅅ호텔로 일부 주민을 불러내 유치 추진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양산군 환경운동단체 관계자 ㄱ씨)
 “핵쓰레기장 유치를 찬성하는 지역개발추진위원회 소속 간부가 한 주민에게 전화를 걸어 활동비 지급을 전제로 추진위에서 일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그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 월급 90만원과 식대 등을 포함해 월 활동비 1백15만원을 줄 테니 추진위에서 일해 달라는 내용이다.”(환경운동연합 정책실 ㅁ씨)

 과기처가 지역 개발을 미끼로 비밀리에 일부 주민을 부추겨 유치 찬성파를 만들고, 지역 주민이 유치를 찬성하니 핵쓰레기장을 건설하겠다는 식으로 유도해 간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과기처의 주장은 이와 전혀 다르다. 울진 지역을 담당했던 원자력개발과 사무관 ㄱ씨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면서 자신이 겪은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유치를 찬성하는 주민들은 말도 꺼내지 못한다. 만날 수도 없다. 반대 시위가 일자 찬성 주민들은 모두 피신했다. 설명회는커녕 홍보 자료 한 장도 돌려보지 못했다. 반핵파(유치반대투쟁위원회)의 목소리만 있다. 안전성 여부를 떠나 찬성인지 반대인지 주민들이 자기 의사도 제 맘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회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사태 전에 찬성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울진에 내려갔다. 폐기물 처리장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기다리던 반핵파 간부들을 만났다. 나를 보자 대뜸 ‘겁없이 왔군 ! ’이라고 말을 꺼내면서 당장 떠나라고 강요했다. ‘나는 국가 사업을 추진하는 공직자다. 맞아죽어도 좋다. 주민들을 만나고 가겠다’면서 버티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비밀리에 주민들을 만나거나 설득할 이유가 없다.”

 양측의 주장은 극과 극을 달린다. 현지 주민들은 찬 · 반 양파로 나뉘고, 국가 차원의 원자력 정책은 현장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채 갈팡질팡해 핵쓰레기장 건설은 88년 이후 6년째 떠돌고 있다. 과기처 원자력개발과 직원은 과장을 포함해 총 6명이다. 사태가 터지기 직전 울진에 내려가 주민 접촉을 시도하는 등 현장 업무를 담당했던 실무자는 개발과의 사무관 한 사람뿐이다.

 핵쓰레기장은 읍이나 면 · 동을 입지 단위로 한다. 해당 읍이나 면 주민의 동의를 얻어내면 된다. 울진군이나 양산군의 경우 울진군 기성면과 양산군 장안읍이 예상 지역이었다. 이럴 경우 해당 읍이나 면 주민들보다는 주변 읍 · 면 주민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게 마련이다. 울진군 기성면의 경우 과기처가 제시한 지역발전기금(3백억~5백억원) 가운데 70%가 기성면에 할당되고, 주변의 원남면이나 평해읍에는 나머지 30%가 돌아간다. 반대시위 때 이 지역보다는 죽변이나 후포 쪽 주민들이 많이 참가했던 것도 현지의 얽히고 설킨 사연을 대변한다.

 과기처 판단에 따르면, 울진군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강력한 조직력을 갖춘 ‘원전반대투쟁위’가 있으며, 91년 6개 후보 지역을 발표했을 때에도 가장 ‘극렬한’ 시위를 했던 곳이다. 이에 반해 이번에는 사상 처음으로 주민 과반수 이상이 찬성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반핵 세력이 위기감을 느꼈고, 정부의 원자력 정책에 일대 타격을 가하겠다는 의도 때문에 과격한 반대 시위가 있었다는 것이 과기처의 주장이다. 과기처의 주장이야 어떻든 울진군 사태는 90년 안면도 사태 이후 반복되었고, 여전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핵쓰레기장 설치 정책의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정치적 이유도 행정 파행에 한몫한다. 6개 후보지가 발표된 것은 노태우 정권 때인 91년 12월이다.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3개월 뒤인 92년 3월에는 14대 총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주민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정부로서는 유야무야 물러서는 도리밖에 없었다.

일관성 없는 행정 파행의 ‘업보’
 일본 북부 아오모리 현 로카쇼무라는 저준위방사폐기물 처분장 건설의 상징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낙후 지역인 이곳이 처음 처분장으로 선정되었을 때 주민 1만2천명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국가 차원의 사업이니만큼 주민 설득과 지역개발 계획 제시 등 적극적으로 폐기장 설치에 매달렸다. 현재 로카쇼무라에는 석유비축 시설 외에 원자력 시설 3개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연구센터는 방사성 폐기물의 안전성을 홍보하면서 선진 외국의 핵쓰레기 처분장의 설치와 운영을 예로 제시하곤 한다. 스웨덴 포스마크의 해저동굴 영구처분장, 영국의 드릭 처분장, 원자력 발전 점유율이 세계 1위인 프랑스 라망쉬의 폐기물 처분센터, 37만평의 대지에 자리잡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반웰처분장 등이다.

 이곳에 핵쓰레기장이 자리잡기까지 국민 투표 · 국회 승인 등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자됐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도 주민에 대한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행정력이 먹혔고, 철저한 방사능 유출 감시 체제 등 일관성 있는 관리 운영체제 도입이 우선시되었다. 권위와 폐쇄로 일관된 행정편의주의, 허술한 안전 관리 체제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우리의 핵쓰레기는 지금도 임시 저장고에 저장되고 있다. 지표면을 파고 묻는 천층 방식이냐, 해저 터널이나 폐광을 이용한 동굴 방식이냐가 논란이 아니라, 어디에 저장할 것이냐가 숙제인 것이다. 일관성 없는 행정 파행의 업보이다.
李興煥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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