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대에도 ‘脫農’바람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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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대마다 ‘농’字 뺀 새 이름…농촌경시 심화 우려



 지난 3월 초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는 색다른 현판식이 열렸다. 45년 동안 정문에 붙어 있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라는 빛바랜 현판이 내려지고 그 자리에 ‘농업생명 과학대학’이라는 새 현판이 달렸다. 비슷한 시기에 고려대학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고려대학교 농과대학’ 현판을 ‘자연자원대학’으로 바꾸어 단 것이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농과대학들이 앞다투어 간판을 내리고 있다. 단과대학 이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소속된 학과들 이름도 잇따라 바뀐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올해부터 임학과가 산림자원학과로, 축산과가 동물자원학과로, 임산가공학과가 임산공학과로 바뀌었다.

 고려대는 농업 관련학과의 이름을 바꾸는 폭이 더 넓다. 농학·원예·임학과가 각각 식량자원·원예과학·산림자원학과로 바뀌었고, 농화학·농생물학·축산·농업경제학과는 각각 응용화학·응용미생물학·동물자원학·응용경제학과로 이름을 바꾸러 하고있다. 건국대와 동국대의 농과대학도 생명과학대학이나 자연자원대학 같은 이름을 후보로 올려놓고 변경을 서두르고 있다.

 변경된 대학과 학과의 명칭을 살펴보면 ‘농’ ‘축’ 등의 글자가 주로 ‘과학’ ‘응용’ 등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들어 잇따르고 있는 농과대학의 ‘탈농현상’은 지난 90년 8월에 있었던 전국 농과대학 학장회의에서 비롯된다. 이 회의에서 각 대학 학장들은 “농업부문의 학문이 생산·경작 위주의 범주에 머물러 다가오는 21세기의 생명과학을 이끌어가기에는 현행 농과대학 명칭이 부적합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대체된 ‘과학’ ‘응용’에 질적 개선 따라야

 여기에 더욱 현실적인 이유로 고교생들이 농대 진학을 기피하고 농대 재학생 역시 장래 전망을 놓고 패배의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학과 명칭 변경이 그런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했다. 농과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학 이름을 바꾸는 데 대해 그다지 반대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농대 재학생들은 그동안 농업경시 풍조 속에서 ‘농’자가 들어간 학과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취직 등에서 사회적인 푸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명칭 변경으로 얼마간의 사회적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각 농과대학의 명칭 변경이 본격화하면서 문제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지 교과과정 개편, 교수 충원, 실험·실습 기자재 들은 전에 비해 달라진 것이 없다는 소리가 높다.

 또한 한국 농업이 급속히 해체되어 가는 때와 맞물려 농과대학 이름 바꾸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나타내는 농학도도 많다. 대학 당국은 명칭 변경의 근거로 미국 일본 같은 농업선진국의 예를 들지만 그들은 자국 농업의 발전에 맞게 농학이 분화 발전되어가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농학은 그나라 농업 현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농업과 농학이 낙후된 것은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책 없이 수입 개방하고 정부지원이 부족하다며 다른 곳에서 활로를 찾으려 해온 농학연구자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농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모씨는 이렇게 말하며 “농과대학 이름을 바꾸는 것은 농업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서울농대의 경우 올봄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모임이 생겼다. ‘농업·농학 제자리찾기 소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에 들어간 이 모임은 오는 6월28일 학교측 인사, 전문가, 학생 들이 참여하는 ‘농학의 바른 자리매김을 위한 대토론회’를 준비중이다. 건국대의 경우도 농과대학 학생회를 중심으로 학교측이 농대 이름을 바꾸려하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제 한국 농업의 위기는 농학 분야의 탈농으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대학만이 아니라 전체 농업 교육기관에서 비슷하게 진행되는 추세이다. 지난 88년 이후 전국의 순수 농업고교가 62개에서 40개로 줄었다. 농업 전문대 역시 7개에서 4개로 줄었다. 그나마 남은 농업고교도 대부분 이름을 종합고, 실업고 등으로 바꿨고 농학과를 폐지해버렸다.

우리 농업에 이념과 기술을 제공하는 교육기관들의 이같은 탈농현상이 나라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몰고올지 국민적인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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