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은 핵가족 의식구조는 대가족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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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에 살펴보는 한국가족의 실상과 허상

“저 셋째네가 제일 안 내려와.” 어머니 崔內貞씨(66)는 셋째아들 李載雲씨(33·김형윤편집회사 편집과장) 부부를 가리켰다. 맞벌이부부인 셋째와 아내 權敬姬씨(32·한국관광공사)는 웃었다. 명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조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시사저널》덕분에 ‘졸지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랜만에 온가족이 모인 것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워 보였다.

 당신이 태어났고 부모 산소를 모신 고향 산골, 다섯아들을 키워낸 충남 청양군 운곡면에 서 최씨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버지 李相範씨(77)는 무연한 낯빛으로 다섯 아들과 네 며느리 그리고 네 손자손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가의 아버지 이씨는 “지금 애들, 우리가 살아온 얘기하면 다들 거짓말이라고 해”라며 30여년 전 이땅의 부모와 어린 자식들이 건너온 ‘궁핍의 세월’을 들려준다.


산업화 요구에 따라 출현한 핵가족

‘들 하나 건너’에서 시집온 어머니 최씨는 ‘보리모가지 잘라서’끼니를 때우던 시절을 털어놓는데 그때를 ‘지독한 시집살이’라고 했다. 네 며느리가 다 따로 나가 살지만 틈이 나면 자주 찾아온다. “요즘 시골은 다들 늙은이만 살어. 외로울 때가 많지.” 어머니 최씨는 음식이 나오자 손자손녀의 입에 넣어주기 바쁘다.

 이상범씨 일가는 요즘 우리사회에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핵가족의 역사적 배경과 ‘오늘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 준다. 載亨씨(41·대전대운설비공사 대표)는 열여섯 이던 66년에 상경했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5개년계획 아래 공업화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離農向都. 대가족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둘째 載貞씨(37·대전 금강 설비공사 대표)는 그래도 농촌에 오래 남아 있던 경우였다. 아버지와 함께 정미소를 하다가 스물다섯에 상경했다. 이씨의 다섯 아들은 둘째를 제외하곤 모두 10대 후반에 직장과 학교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

 우리나라의 가구당 평균가족원 수는 해마다 현격한 감소 추이를 보이고 있다. 55년에는 5.7명이던 것이 70년에는 5.2명, 85년에는 4.2명으로 줄어들었고 2000년대에는 가구당 평균가족원수가 3.6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결혼한 부부와 그 자녀’로 구성되는 핵가족이 보편화된 데에는 개인들의 의식,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사회적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공업화·산업화 정책은 새로운 일터를 제공하면서 한편으로 핵가족을 촉진하는 ‘주범’이다. 70년대 당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젊은 부부는 ‘시대에 뒤진 듯한 열등감’을 갖기 시작했다. 급속한 산업화에 효과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핵가족은 당연시되었다.

 70년대 후반, 젊은층이 핵가족은 선호·선택한 까닭은 첫째가 ‘남편 직장 때문’이었다. 두 번째가 ‘장남이 아니므로’, 세번째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순이었고, ‘살림 경험을 위해’ ‘시댁의 주거형편 때문에’ 등의 원인으로 핵가족을 택한 사람도 있었다(77년 이화여대 최신덕 교수 연구 발표). 그러나 위의 원인에서 보듯 핵가족은 구성원의 주체적 요구보다 사회적인 환경변화에 의해 불가피하게 촉발된 경우가 많았다. 李?再씨(전 이화여대교수·사회학)는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생산단위의 개인화에서 핵가족화가 이루어졌다”고 풀이한다.

 핵가족은 개인의 존엄성과 남녀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단위이다. 당사자들의 결정에 의한 결혼, 핵가족내에서의 역할분담을 통한 가정의 민주화를 젊은층들은 실천하고자 한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젊은층들은 핵가족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외형적으로 핵가족이지만 그 내용은 대가족”이란 지적이 오늘날 모든 핵가족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를 압축하고 있다. 특히 분가한 장남과 맏며느리가 갖는 부담감은 크다. 이재형씨의 부인 尹英子씨는 친정보다 시댁에 자주 가고는 있지만 “시부모를 모시지 못해 늘 죄송하다”고 말한다.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죄의식’뿐 아니라 長兄으로서의 권위가 약화되는 안타까움마저 안고 있는 것이다.

 이씨의 셋째 재운씨 부부처럼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맞벌이 부부들은 시댁이나 친정쪽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맞벌이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갖게 된 젊은 핵가족들이 시댁이나 친정 부모의 도움을 청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어머니가 되기 위한 준비와 육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친정과의 가까이 사는 핵가족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의 견해를 간추려보면, 현대핵가족이 노출시키는 특징들은 △가족이기주의 △노인문제 △결혼생활의 불안정성 △부모와 2세간의 부조화와 그에 따른 가족의 분열 △여성의 역할 변화 및 가부장의 무기력화 △젊은 핵가족부부의 가사분담 등으로 나타난다. 아직 건강한 핵가족문화가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현대핵가족 문제의 근본적 원인 가운데 하나를 한국임상심리치료센터 李進雨원장은 “결혼교육이 전무한 상태에서 결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당사자의 애정이 중시되고는 있지만 배우자에 대한 정확한 탐색과정없이 상대방의 학벌, 집안, 경제력 등 ‘조건 대 조건’이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을 이룬 뒤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원장은 “부부뿐 아니라 부모가 되기 위한 훈련도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아이를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젊은 엄마, ‘결혼한 독신자’로 전락하는 남성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머니의 어린아이에 대한 소유욕은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남편에 대한 보상심리이다.

 아이들을 잠재우고 부부가 주말 심야극장을 찾는다거나 부부가 같은 취미 생활을 즐기고, 가족단위로 나들이하는 모습 등은 핵가족 ‘가정평화’를 보여주는 새풍속으로 여겨질 법하다. 그러나 가정법률상담소의 통계자료를 보면 ‘결혼생활의 불안정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평균혼인율이 10년마다 배로 증가하는 대신 평균이혼률은 두배씩 증가하고 있다.

결혼 5년 못넘기고 이혼하는 부부 급증

 대법원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이혼하는 부부의 수는 매년 2천~4천쌍씩 증가하고 있다. 88년의 경우 이혼한 부부는 8만4천9백33쌍으로, 이중 결혼 5년 이내에 이혼한 부부가 70%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많은 젊은 부부들이 토로하듯이 부부간의 갈등을 중재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번 마찰이 일어나면 심각한 지경까지 치닫는다. 思秋期로 불리는 중년부부의 ‘위기감’도 심각해지고 있다. 핵가족제 속에서 중년주부들은 대가족제에 비해 자유로워 보이지만, 주부의 소외감이 가중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남편은 일에 파묻힌 채 아내의 존재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기세계를 완강하게 고집한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중년 여성들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중년 남성의 무기력감도 실로 크다. 宋秀植박사(서울적십자병원 정신과)는 핵가족 중년부부가 부딪치는 문제들의 원인을 먼저 ‘현대인의 의식구조’에서 찾는다. 송박사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이 없으며, 자존의 힘을 상실한 ‘텅빈 나’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가정내에서도 남편과 가장으로서의 제 위치와 역할을 찾지 못한다. 가장에게 생산의 기능만 남은 것이다. 송박사는 “남성의 의식변화가 핵가족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며 남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핵가족 문제는 이상범씨 네 일가처럼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중산층 핵가족’ 계층에서 주로 노출되는 문제이다. 이효재씨의 지적처럼 중산층이상의 핵가족 문제는 지역사회조직이나 민간단체운동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만 도시 저소득층이나 농촌 노인핵가족문제는 국가의 정책 차원에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

 핵가족은 아직도 문화의 차원이 아닌, 문제의 차원이다. 핵가족 문제가 문화의 차원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핵가족제의 허점을 보완하는 ‘실험적인 결혼·가족형태’도 의미있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를테면 무자녀 가족, 부부가 일정기간 별거하는 安息제도 등도 나타날 것이다. 또한 이광규 교수(서울대·인류학)의 전망처럼, 정보화사회가 고도화하여 在宅근무가 가능해지면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우리의 가족주의는 새로운 에너지로 적용할 것”이라고 이교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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