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김 센 기업, 로비스트 ‘전업’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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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업들, 외국 고객 위해 발벗고 나서 … ‘업계 이해’ 내세워 정부에 압력

 미국 정부를 움직이려면 로비스트 말고 기업을 잡아라. 
 미 법무부에 등록한 1만명 외에 등록하지 않은 로비스트까지 합쳐 2만5천명의 로비스트가 활개치는 미국의 로비 시장에 조용한 혁명이 일고 있다. 워싱턴의 거물 인사들이 외국 정부나 기업을 위해 엄청난 수수료를 받고 로비 활동을 하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대신 로비 당사국과 연고가 있는 미국내 기업들이 직접 미국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이는 신종 로비 행태가 급속히 자리잡아가고 있다.

 특히 이같은 신로비 전략은 미국과의 교역량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큰 일본이나 캐나다가 로비의 주무기로 채택한다. 최근 로비 업계에 불어닥치고 있는 변화를 파헤친 <뉴욕 타임스>는 ‘외국 정부들이 미국 기업과 연계해 소기의 목적을 관철하려고 분주히 뛰고 있다’고 내막을 소개했다.

 일본의 대표적 반도체부품 공급 업체인 쿄세라(Kyocera). 미국은 첨단 무기에 쓰이는 반도체 부품의 약 90%를 일본에서 수입하는데 그 대부분을 쿄세라가 공급한다. 동종 업체로 위기 의식을 느낀 미국 세라믹 가공 시스템(CPSC)의 그랜드 베네트 사장은 ‘국가 안전’을 이유로 클린턴 정부에 대해 쿄세라로부터의 부품 수입량을 제한해 달라고 요청했다.

보잉사, 중국 제재 때마다 극구 만류
 쿄세라는 워싱턴의 이름난 로비 회사인 글로벌사를 동원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원군이 나타났다. 미 항공 산업협회측이 쿄세라에 대한 정부의 제제를 반대했다. 대일 교역에서 8대 1의 비율로 흑자를 누려온 항공업계측은 미국 정부가 제제를 가할 경우 업계 종사자들이 타격을 입는다고 우려했다. 거대 기업 IBM도 처음엔 제제에 찬성했다가 곧 반대로 돌아섰다. 일본내 IBM 합작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역제재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결국 업계의 압력에 굴복해 쿄세라에 대한 제제 방침을 포기했다.

 미국 최대의 민간 항공기 회사인 보잉사. 해마다 수천만달러어치의 신형 항공기를 중국에 수출하는 보잉사는 이미 중국 정부의 충실한 로비스트가 됐다. 클린턴 정부가 인권 상황을 이유로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 조건을 철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때마다 보잉사는 중국 정부를 위해 발벗고 나선다. 중국정부는 구태여 거물급 로비스트를 동원하지 않고도 로비 효과를 얻은 셈이다.

 이런 예도 있다. 미국 관세청이 일본 혼다 자동차의 미국 공장 부품 생산에 규제를 가하려 하자 엉뚱하게도 캐나다 정부가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 규제 조처가 캐나다내 혼다 자동차에 악영향을 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결국 혼다사는 캐나다 정부의 로비 덕분에 규제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같은 신로비 행태를 두고 워싱턴에 있는 한 로비 회사의 중역인 랜스 모건씨는 “밀실 로비 시대는 끝났다. 이젠(로비가 필요하면) 미국의 맹우(alley)를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앞으로 미국에 제휴 또는 합작 기업이 많은 나라일수록 그만큼 로비력도 커질 수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로비의 천국이다. 특히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이 복잡한 만큼 각종 압력 단체가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온갖 로비를 펼친다. 로비는 상충된 이해관계의 절충 방식이란 차원에서 부정적인 면만을 내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미국인의 시각이다. 로비를 일상 생활의 일부로까지 인식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로비가 외국 고객을 위해 행해질 때 상황은 좀 다르다. 어디까지가 로비 행위이고 어디까지가 매국 행위인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외국인도 로비등록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등록하면 로비 활동을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각국의 로비전도 치열하다.

정부 규제로 직업 로비스트 입지는 줄어
 지난해 미국 법무부가 파악한 각국의 대미로비 현황에 따르면 일본이 단연 앞선다(도표 참조). 일본 기업이 지난해 로비 활동에 쓴 돈은 자그마치 6천달러가 넘는다. 이 액수는 2위를 차지한 캐나다(2천2백71만달러)의 3배, 22위에 머문 한국(2백70만달러)의 30배에 이른다. 미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88~92년 법률회사에서 홍보전략회사에 이르기까지 1백25개 이상의 각종 로비 단체를 고용했다. 이쯤되면 워싱턴의 내노라 하는 로비 회사는 일단 일본 기업을 위해 일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수백개 일본 기업의 로비를 맡은 한 대형로비회사의 변호사인 지로 무라제씨에 따르면, 일본인은 일단 로비 회사와 관계를 맺으면 장기적 차원에서 꾸준히 공을 들인다. 오늘은 로비 회사 변호사이지만 내일은 행정부의 고위 관리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 가능성 때문이다. 사실 클린턴 행정부의 각료 가운데는 로비스트 출신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 새무엘 버거 안보담당 부보좌관, 로널드 브라운 상무장관, 하워드 패스터 백악관 의회담당관, 미키 캔터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꼽을 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막바지 선거유세 때 외국 고객을 위한 로비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공직자 윤리법을 개정해 로비스트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했다. 이에 따라 현직 관리가 공직을 떠난 후 1년 이내에는 로비 활동을 못하도록 한 규정을 5년으로 늘렸다. 또 퇴직 후 종전 직장을 상대로 한 로비활동 금지 기간도 종전의 1년에서 5년으로 연장했다. 특히 외국 정부를 위한 로비 활동은 영구히 금했다. 이러한 로비규제 조처는 고위 공직자가 퇴임하면 외국 정부나 기업을 위한 로비스트로 활동하다 기회가 생기면 다시 정부에 들어오는 ‘회전문 현상’을 원칙적으로 봉쇄하겠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지금 ‘회전문’을 통해 정부에 들어온 전직 로비스트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일본의 신로비 전략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70년대 박동선씨의 미 하원의원 ‘로비 매수’ 사건으로 미국과 외교 마찰까지 빚은 경험이 있는 한국으로서는 아직도 대미 로비가 시원치 않고 로비액도 적다. 지난해 우리가 로비에 쓴 돈은 2백70만달러. 같은 아시아국인 홍콩이 1천50만달러, 대만이 8백30만달러를 쓴 데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연고가 있는 미국 기업이 많을수록 우리의 대미 로비 효과도 클 것으로 보인다.

 미 무역대표부 고위 관리를 지낸 조셉 매시씨가 “외국 고객을 위한 로비스트들이 워싱턴에 오면 관리들로부터 점잖은 대접을 받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상대가 미국전신전화국(AT&T)이나 모토롤라사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관리들은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라고 지적한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卞昌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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