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치니즘’ 좌초 경제 · 이념 휘청
  • 모스크바 · 김창진 통신원 ()
  • 승인 199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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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혁 실패 · 인기 폭락 ··· 고르비 再版 될 수도



 작년 초여름 사상 최초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모스크바와 러시아 전역에 휘몰아친 옐친 열기는 한해가 지난 지금 간 데가 없다.

 당시 대중은 점점 악화되는 생활수준에 반해 지지부진할 뿐인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실망해서 반사적으로 ‘시대의 구세주’라며 옐친에 열광했다. 대학생에서 택시운전사, 연금을 받는 노파, 그리고 개혁파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옐친은 가장 확실한 고르바초프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때 열광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큰 며느리를 제대로 알려면 둘째 며느리를 얻어봐야 한다”는 속담을 씁쓸하게 상기하고 있다. “옐친은 선동가이지 책임있는 정치가는 아니다”라던 일부의 비판적 지적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대중은 과연 무엇에 실망했는가. 그들은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자유를 얻었고 시장에서 더 많은 물건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했다. ‘시장경제’로 대전환하기 위한 원대한 구상의 1단계 조치로 올초 단행된 가격자유화조처는 생산시장을 정상화하는 효과는 전혀 가져오지 못한 채 마피아의 농간에 놀아나는 소비시장만 잔뜩 부풀려놓았을 뿐이다. 그 소비시장에서 시민이 살 수 있는 물건이라곤 기껏해야 빵과 감자, 그리고 몇 킬로그램의 고기뿐이다. 발빠른 신참 비즈니스맨과 외국 합작회사의 취업한 사람을 뺀 대다수 사람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허덕이는 생활을 감수해야만 한다.

 국유재산을 사유화하거나 정상적인 시장경제를 창출하는 기반으로 사적소유제도를 일반화시킨다는 정책목표는 법령상의 문안에나 남아있을 뿐, 실제로는 다시 독점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과거 당 관료나 각종 국가기관 책임자가 정보 · 자금 · 조직 등 자신의 기득권을 통해 ‘국가 돈으로 국가 기업을 사들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장이나 땅을 사들일 돈이 있을 리 없는 노동자 농민 사무원 들은 이제 ‘자본가’의 얼굴을 한 그런 기득권층에게 고용되어 또다시 착취당하거나 해고의 위협앞에 벌거벗긴 채 줄세워져 있을 뿐이다.

 

해외원조로 경제 살리기는 역부족

 옐친은 이같은 절박한 문제들을 해외원조를 통해 해결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백40억달러의 원조를 약속받은 것이 지금까지 그가 얻어낸 가장 큰 성과이다. 하지만 수치로 보더라도 러시아 경제를 되살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그 원조(서독측이 옛 동독 쪽에 퍼부을 돈은 2천억달러로 예정되고 있다)조차 제대로 이행될지 의문시 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많은 대중은 초초와 분노의 감정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6월초 러시아공화국 13개 도시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5%가 ‘불안하다’, 11%가 ‘공포를 느낀다’고 대답했다. ‘희망이 있다’ ‘안전하다’라고 응답한 시민은 각각 32%, 6%였다.

 낭만적인 ‘자유경제’와 들뜬 ‘민중주의’가 결합한 옐치니즘은 탈공산주의체제의 냉정한 현실에서 실험을 시작하자마자 좌초할 위기에 몰려 있다. 옐친 특유의 돌파력이 이 난국에서 솜씨를 발휘할 여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경제개혁의 총감독으로 활동해온 가이다르 총리의 대한 옐친의 보호 능력에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루츠코이 부통령이나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 등 일부 반대파의 견제로부터 가이다르팀을 방어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정책이 실패한 데 대한 일반시민의 광범한 책임추궁으로부터 그를 구출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지금까지 옐친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이었던 ‘민주러시아’가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점도 옐친에게 작지 않은 약점이 되고 있다. 이 급진개혁파는 최근 ‘군산복합체의 독재위협’을 경고하면서 옐친에게 민주개혁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나섰다.

 그렇다고하여 옐친이 신공산주의자들과 화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옐친의 ‘배신’을 결코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온건 민족-애국주의자들과 연합하는 길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옐친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대중의 부풀었던 기대에 못미치는 지지부진한 개혁과 폭락하는 대중적 지지. 과거 고르바초프를 밀어냈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옐친도 고르바초프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시중에 도는 얘기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비즈니스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세르게이 바로조프씨(30)는 이렇게 말했다. “옐친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는 아마 올 가을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올가 알렉산드로크나씨(50)도 똑같이 불길한 예언을 했다. “올 가을에 다시 한번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지금 이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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