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공영방송 KBS는 어디로 신임사장 거부파동…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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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권’과 ‘언론민주화’ 갈등 노출

신임 서기원사장 취임을 둘러싸고 벌어진 KBS사태는 한국방송사상 “가장 생생한 드라마이며 다큐멘터리”라고 불리면서 사태발생 즉시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또한 이번 사태는 그 원인과 성격이 중층적이어서 신임 사장과 노동조합의 갈등에서 곧바로 정부의 ‘통치권’대 ‘언론민주화운동’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정치문제로 번지면서, 정부당국과  KBS사원 양측의 사태 원인과 성격을 보는 시각 그리고 해결책 주장이 줄곧 평행선을 치달아왔다.

정부는 왜 서기원사장 취임을 고수하고 있으며 KBS사원들은 또 왜 서기원씨의 사장 취임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인가?

정부당국의 입장은 최병렬 공보처장관과 서기원사장의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정부는 KBS이사회의 제청에 대한 대통령의 승인이라는 ‘절차상의 합법성’을 내세우면서 KBS사원들의 사장 퇴진 움직임을 불법이라고 일찍부터 못박고 사태발생 열흘이 넘도록 한발짝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최장관은 지난 19일 열린 국회 문공위에서 서사장이 퇴진할 이유가 없다고 거듭 주장하면서 “지격있는 사람을 노조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퇴진시킨다면 현 노사관계 전체에 파급될 영향이 심각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장관은 또 “지난 2년간 우리 안목으로 보기에는 KBS방송의 역편파성이 있었다”고 말해 그간 KBS의 방송내용에 대해 정부측의 불만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정부에선 ‘희생불사’ 강격대응 방침

이날 국회 문공위에서는 서사장의 임명제청 과정, 서사장의 전력 문제, 서영훈 전 사장의 사퇴 배경, 정부의 對언론정책과 이번 사태와의 관계 등에 대한 여야의 시각 차이가 드러났을 뿐 아니라 ‘선사퇴론’과 ‘선정상화론’이 맞서 사태수습에 실효를 거두지 못햇다. 이 자리에서 서사장은 “지금 물러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가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답변하면서 ‘선정상화’를 거듭 강조했다.

민정계 여당의원들은 KBS노조의 사장 배척운동은 노조의 인사권 개입이라면서, 신임사장 배척운동이 언론민주화운동이라면 그 수단이 불법적이고 비평화적이어도 괜찮은가 따졌고, 그중 일부는 사태의 원인이 KBS사원들에게 있다고 화살을 KBS내부로 돌렸다. 반면 야당 의원들은 물론 여당내 민주 · 공화계 의원들도 서사장의 ‘무리수’를 지적하면서 서사장 퇴진을 주장하는 한편 최장관의 책임을 추궁, ‘또다른 민자당 내분’을 재현했다.

정부측이 이번 사태를 단순히 방송계의 문제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난 18일 열린 정부의 산업평화대책회의 및 23일 발표된 정부4개부처장관 담화문에서도 확인된다. 정부부처의 실무국장들로 구성된 ‘대책회의’는 KBS사태의 처리과정에서 정부의 법질서 확립 의지가 약화될 경우 앞으로 노사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또 23일의 정부담화문에서는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KBS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혀 최악의 경우 ‘사태수습’을 위해 공권력 투입 등의 강경대응도 불사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정부의 이같은 태도는 19일 최병렬장관의 국회문공위 답변 도중 튀어나온 민방 설립과 송출공사 설립 등의 발언과 관계가 있지 않느냐는 분석도 있다. 또 문공위가 열리던 19일 오후 서기원사장과 KBS집행간부 7인이 방송정상화를 주장하며 KBS노조를 정면공격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정부의 ‘강경론’과 관련이 있지 않느냐 하는 풀이도 나오고 있다.

高熙一 프로듀서가 사원대표로 국회문공위에 출석해 발언한 것처럼, KBS사원들은 ‘전 사원의 서사장 퇴진운동’으로 확대된 이번 사태를 노사분규가 아닌 ‘언론의 자유를 위한 몸부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KBS사원들은 △쿠데타를 제외하고 방송국이 공권력에 장악된 적은 없었으며 △청와대대변인 · 서울신문사장 등 권력지향적인 전력을 불문에 붙인다 하더라도 공권력을 투입한 서기원씨는 KBS사장이 될 자격이 없고 △사장 취임 반대는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KBS자주권수호전사원비상대책회의(비대위)는 23일, 사태해결을 위해 누구와도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서사장 퇴진을 가운데 놓고 정부의 ‘선정상화 수퇴진’ 과 KBS비대위의 ‘선퇴진 후정상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이번 사태에 대해 방송계 일각에서는 정부의 방송 재장악 음모라는 의혹을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정권 재창출의 전주곡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자는 “이번 KBS사태는 정권재창출이란 큰 구도하에서 이루어지는 방송계 재편 과정의 한 전주곡”이라고 말하고 국회문공위가 열린 4월19일 이후 사태는 방송의 차원을 넘어섰다고 분석했다. 이번 사태의 중재역을 맡고 있다는 또다른 학자는 “현재의 사장 선출방식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이번과 같은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라고 제도적 문제를 지적하고 4월20일 이후 “서기원사장은 ‘역할’이 끝나 홀가분한 상태”이며 “KBS사태는 최병렬공보처장관의 손에서도 떠난 상태”라고 말해 권력의 핵심부에서 ‘타협선’이 결정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매듭지어지든 방송계 전체는 ‘갈등의 터널’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KBS사태 정상화 이후에도 제연될 ‘불씨’들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31일 제출된 방송제도연구위원회의 최종보고서를 토대로 해 곧 발표될 정부의 방송법 개정안이 오는 5~6월경 국회에서 통과되면 민방 설립과 KBS의 감량화, MBC의 민영화가 이루어지고, 방송제작환경이 방송보도공사와 방송제작공사로 분리되는 한편 송출업무 · 제작지원 부문 등도 분리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이 대폭적인 변화 과정에서 또 한차례의 마찰이 예상되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방송제도연구위원회의 중간보고서가 발표될 때에도 논란이 있었지만, 공영방송체제를 주장하는 방송학자들과 방송사 노조는 “민영방송을 허가하려는 정부의 방송제도 개편 계획은 방송계 장악 시나리오”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반해 민영방송 허용론자들은 민영확가 세계적 추세임은 물론, 채널수를 증가시켜 시청자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주어야 할 뿐 아니라 뉴미디어 등 급속한 방송환경 변화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李敏雄교수(한양대 · 신문방송학)는 89년 12월, 80년대 방송계를 정리하는 내용의 한 기고문에서 “90년대에 외부로부터 방송에 가해질 도전은 매우 교묘한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라는 말로 이번과 같은 사태를 예견한 바 있는데 민영방송 허용론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근거가 학술적으로 희박하다고 지적한다. 이교수는 위의 글에서 “5공초기에는 강제적으로 통폐합을 단행했던 반면에 지금은(89년말) 정당성 확보 집단까지 구성, 홍보전략을 세우는 등 세련되고 교묘해졌다”고 밝히고 앞으로 민영방송이 등장할 경우 겉으로는 재벌단체에 자율권을 주면서도 간접통제 구조 속으로 편입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민성금 4천7백만원

아무튼 KBS사태가 장기화되자 ‘전파의 소유권’을 내세우면서 방송의 정상화부터 촉구하는 시청자들이 있는가 하면, 방송을 정상화시키면서 주장을 관철하라는 반응도 있고, 5공시절의 방송으로 돌아가면 안된다며 뜻을 굽히지 말라는 적극적인 지지파 시청자들도 있다.

비대위에 따르면 4월20일 현재 성금이 4천7백만원 정도 접수됐으며 3백개 단체에서 지지성명을 보내왔고 성품을 직접 KBS로 가져오는 시청자들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전파소비권을 전면에 등장시킬 경우, 지하철 파업 때 경험한 것처럼 사태의 본질과 원인은 희석되면서 방송의 정상화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는 우려 때문에 일부 시청자 · 소비자단체와 언론계에서는 조심스런 반응으로 보이고 있다.

“가장 온건한 방법은 서사장 자진사퇴”

지난 4월20일 저녁 김영삼 ·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과 박태준 최고위원대행이 회동, 이번 사태의 심각성에 인식을 같이하고 조속한 처리방안을 모색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한편 최병렬장관과 김윤환 정무장관은 KBS노조측과 대화에 나섰고 방송위원회 강원용위원장도 중재안을 들고 나올 것이 예상돼 25일 전후가 이번 사태의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23일 현재까지 알려진 바를 종합하면 정부와 KBS 양측의 명분을 살리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 질 전망이다. 이번 사태의 ‘結煮’였던 KBS이사회가 그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전사원이 반대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서사장의 집무는 어렵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보는 전반적인 시각이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가장 온건하게 사태를 수습하는 방법은 서사장이 자진사퇴하되 그 시기는 방송 정상화 이후로 잡는 것”이라고 익명을 요구한 중재역 한 사람은 말했다. 그러나 타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KBS 해체라는 최악의 사태도 벌어질 수 잇다는 우려마저 있다. 또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민자당에 의해 가시화되고 있는 정권의 재창출 과정이란 맥락에서 보면 방송계뿐 아니라 기타 사회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사태가 또 발생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정부4개장관 담화문의 ‘강도’에서 보여지듯 KBS사태를 노사관계로 보는 정부 · 재벌 측에서는 이번 사태가 25일의 현대중공업 파업논의와 더불어 5월 춘투로 불똥이 튀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공영방송’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

이번 사태에 대한 정부와 KBS의 손익계산서가 양쪽 모두의 기대에 못미칠 것이란 예측도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정부는 방송(언론)을 무시했으며 방송은 국민을 무시했다”는 兩非論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기 때문에 그같은 ‘손익계산’이 가능한 것이다. 양비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정부나 방송사가 ‘국민의 방송’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KBS는 거듭나야 한다고 방송계 안팎에서 지적한다. 경영쇄신과 민주적인 인사풍토를 자율적으로 이뤄내야 하며 아울러 비정상적인 공영방송체제에서 굳어진 매너리즘을 극복, 창의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주문이 그것이다. 또 이번 사태의 책임을 면할 수 없는 KBS이사회와 방송위원회의 독립성과 대표성 확보도 시급한 것으로 지적된다.

새 방송법에 따라 KBS에 경영위원회가 구성되고 방송위원회의 권한이 강화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공영방송이 권력과 재벌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지 못하면 이번과 같은 사태는 언제든지 재연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문공위 직후부터 민방 설립과 현 방송체제 변화가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번 KBS사태가 교훈으로 보여주듯이 정부에 대한 국민과 방송현장의 ‘오해와 불신’은 정부가 명실상부한 공영방송에의 의지를 밝힐 때 청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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