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잘벌면서 존경도 받는 신문
  • 이재원 (美클리블랜드주립대 교수) ()
  • 승인 1990.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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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황무지 스페인에 <엘 파이스>바람… 독재 정항 언론인들이 모여 만들어

프랑코 총통의 36년간(1939~1975)에 걸친 독재정치 여파로 기형적인 발전을 해왔던 스페인 언론계에 드디어 현대국가의 위상에 걸맞는 일간지 <엘 파이스>(El Pais · 나라)가 나타나(1976년 창간) 이제는 이 신문이 스페인 문화권의 주도언론으로 성장을 하고 있다. 더욱이 <엘 파이스>는 새로이 출발하는 신문이 존경을 받으면서 기업적 성공도 거둘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스페인은 세계적 수준의 문화와 예술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가득한 고야,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그리고 스페인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세르반테스는 과거로 치더라도, 금세기 스페인의 문화와 예술의 발자취 역시 찬란하다. 피카소, 미로, 달리의 미술,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철학 · 심미학, 카잘스와 세고비아의 연주, 플라시도 도밍고, 테레사 베르간자의 노래, 그리고 건축에는 바르셀로나의 가우디가 있는 나라이다.

이러험 문화와 예술에서는 손색이 없는 스페인에서 유독 언론의 발전은 미미하였다. 지금도 <엘 파이스>를 제외한다면 스페인의 언론문화는 다른 분야에 비해 초라하다. 인구가 4천만이나 되는데도 1백만부를 발행하는 신문이 없다. 일간지는 1백20여개에 이르지만 ·10만~20만부를 발행하는 신문이 5개에 불과하고 대부분 3만~5만부 정도의 신문들이다.

그러한 스페인에서 프랑코 사망 다음해에 독재시절에 미움받았던 언론인들이 모여 세운 신문이 <엘 파이스>이다. 창간된 지 불과 14년밖에 되지 않는 신문이지만 이미 스페인 제국시절의 ‘아르마다’(무적함대)와 같은 존재로 급성장을 하였다. 주중에는 35만부, 일요판은 70만부를 발행하며, 체제는 타블로이드판으로 매일 평균 20~30면이다. 현재 중남미 포함 스페인문화권에서 가장 큰 신문이 되었다. 사옥증축을 이미 세번이나 했고, 서적출판국을 신설하였고, 라디오방송국을 운영하며, 텔레비전도 근간 민방이 허가되는 대로 실시할 예정이다.

<엘 파이스>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특성이 있는 신문’으로 출발을 한 데에 있다. 스페인의 기존 일간지들은 정치적 성향에서 여당지, 야당지로 나뉘어 있다. 군인들의 극우성향을 대변하던 <알카자>지는 쇠퇴상태였고, 중도보수지 <야>(천주교회 소속)는 프랑스기업에 흡수되었다. <ABC>는 왕도보수계로서 현재의 사회당 집권에서 야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판도에서 <엘 파이스>는 중도 · 독립적 논조로서 공평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신문을 바라던 독자층에 파고들었다.

중도 · 독립적 논조를 위하여 <엘 파이스>는 기사의 객관적 보도태도를 지향하였다. 이를 위해 신문운영에서 편집국의 우위를 강조하고 취재 · 보도에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자하였다. 마약유입의 경로를 심층 취재하기 위하여 특파원을 터키의 아편농장까지 잠입시키기도 하고, 기름 수송의 전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유조선에 기자를 몇달간씩 상주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편집국 위주의 운영은 일반신문에서 흔히 보는 현상은 아니다. 일반신문들은 기사의 중요성을 강조는 하지만 이를 위한 투자에는 인색하다. 기자들에게 월급만 주면 누에고치 처럼 좋은 기사가 줄줄이 나올 것을 기대하는 것이 상례이다. <엘 파이스>가 광고의 양을 전 지면의 50% 이하로 통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방침이다. 미국과 서구의 신문들은 그날의 광고를 일단 채우고서 나머지 지면에 기사를 싣는다. 그러므로 광고의 양이 50% 이상 75%내지 80%에 이르기도 한다. <엘 파이스>의 직원은 7백여명인데, 편집, 운영, 제작에 균등히 3분뒤어 있다. 외국특파원도 12명에 이른다.

“권투는 야만적 스포츠” 기사화 안해

<엘 파이스>는 정보의 전문화시대 조류에 부합되도록 주중 5일간 매일 특집을 삽입하고 있다. 이러한 특집은 5~10면 정도이며, 이념, 예술, 서평, 교육, 경제가 가장 흔히 취급되는 분야이다. 체육과 연예분야는 극히 선발적으로 취급하고, 투우는 예술면에서 취급하며, 권투는 야만적인 스포츠라고 하여 일체 기사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엘 파이스>는 언론인 자질향상을 위하여 마드리드독립대학교와 제휴하여 신문학대학원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35명 정도의 학생을 등록시키는데 대부분이 <엘 파이스>의 직원들이다. 이러한 교육기회를 통하여 언론인들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지식의 확산추세에 대비한다. 직원의 재교육에 이만한 관심을 갖는 언론기관 역시 흔하지는 않다.

<엘 파이스>는 또한 초창기(1981년)에 컴퓨터를 도입하여 기사작성, 편집, 제작의 전산화를 이룬 것도 성공의 비결이었다. 장기고용직원이 없었으므로 노조의 간섭이 전무하여 일시에 제작의 전산화를 실시할 수 있었다. <엘 파이스>의 전산화는 다른 신문들과 스페인의 출판계가 급속히 전산화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입은 55%가 광고에서 나오고 45%가 구독료로 충당된다. 서구신문들의 수입원은 일반적으로 75%가 광고료이고 25%가 구독료이다. 보장된 수입원인 광고를 무한정 싣지 않는 신문, 그러고서도 흑자를 내며 칭찬과 존경을 받는 신문, 그만하면 새로이 생기는 신문들에 본보기가 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엘 파이스>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스페인 언론전반은 아직도 후진국적인 양상에 머물고 잇다.

독재의 수단으로 오락성 잡지 범람 용인

스페인에서 언론이 발전하지 못한 까닭은 프랑코가 국내의 언론을 자기손으로 양성하고 운영까지 했기 때문이다. 언론인은 3개의 대학교에서 지정된 교과과목을 이수한 사람으로 제한하였고 정부소유의 신문망을 전국적으로 구축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언론은 통치의 보조기관에 불과하였다. 그 당시에 습관화된 언론의 타성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다.

프랑코는 독재의 수단으로 오락성 잡지의 범람을 용인하였다. 그러한 잡지가 현재도 4천여가지나 된다.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말고, 스포츠나 연예에 심취하여 흥겹게 지내는 것이 독재에 유리하엿던 것이다. 그러기에 스페인에서의 신문구독률은 지금도 인구 10명당 1부꼴에 불과하다. 서구 국가에서는 10명당 4부 이상이다.

영국 <가디언>지의 특파원으로 다년간 스페인에 상주했던 잔 후퍼는 《스페인 사람들》(1987)이라는 책에서 스페인 언론문화의 침체는 스페인사람들의 생활관습에서 연유한다고 쓰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아직까지도 관공서의 문이 아침 10시가 되어야 열린다. 오후 2~4시 사이에 점심시간이 있고 7시 반이면 하루의 공식적 일과가 끝난다. 기리고 나서 스페인사람들은 친구와 어울려서 마시고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자정이 넘도록 어울려 노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러한 생활에서 신문을 읽을 시간이 어디 있겠느냐는 관찰이다.
앞으로 2년이면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같은 해에 세빌리아에서는 만국박람회가 열린다. 스페인의 문화와 잠재력이 돋보이게 될 시점을 맞아서 언론도 이에 걸맞는 발전을 강요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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