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폭력'에 죽은 여권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3.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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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여교수 죽음 / 사건본질보다 남녀 관계에만 초점



 지난 10월3일 남자 친구 방영부씨와 함께 강원도 낙산비치호텔 325호에 투숙했던 상명여대 이진분 교수가 13m 아래 나이트클럽 출입구에 떨어져 죽었다. 추석 연휴 뒤끝이라 기사거리가 부족했던 언론사들은 이 '흥미진진한' 사건을 앞다퉈 보도하기 시작했고, 세인의 관심은 그러한 언론 보도에 의해 다분히 성적 호기심으로 이끌려갔다. 언론의 보도와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이씨 사망 사건의 본질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물아넣은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이 아니라 '남녀 관계'쪽으로 선회하고 말았다. 이교수는 불륜을 저지르다가 죽은 여자로 전락한 셈이다.

 이교수가 남긴 두 자녀와 제자들 그리고 그가 열성적으로 관여했던 교육계와 여성운동계 인사들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한쪽으로만 몰아가는 듯한 언론 보도에 대해 분개하기 시작했다. 이진분 교수는 생전에 교육 개혁을 주장해온 '참교육 실현학부모 연대'를 주도했으며 여성운동 단체인 ' 또 하나의 모임' 동인으로 활동한 바있다. 따라서 그가 관련했던 교육계와 여성운동계로서는 이교수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은 커다란 손실이었다. 언론을 향한 이교수 주변 사람들의 원망은 마침내 젊은 대학생들의 손과 발을 빌려 언론 보도에 담긴 가부장적 '담론'을 끄집어 냈다.

익명의 제보자가 '제3의 남자' 로
 같은 여성학자로서 평소 이진분 교수와 친분을 맺었던 연세대 사회학과 조혜정 교수는 '성과 사회' 과목을 수강하던 이 학교 심리학 과 학생 4명과 함께 각 언론사 담당 기자들을 접촉하고 이교수의 자녀와 친지들을 만난 후 신문 기사를 분석했다. 심리학과 3학년인 천정현 조재민 이상은 김정호 씨는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조혜정 교수와 세밀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다. 학생들은 자기들이 작성한 보고서가 사건 발생후 주요 일간지에 실렸던 기사를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기사 뒤에 숨겨진 언론의 가부장적 폭력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한다.

 10월4일 한 조간지는 '40대 여교수 의문의 자살' 이라는 제목의 사회면머리 기사로 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부제는 '여대 총장 장녀 입시부정 브로커와 호텔 투숙 투신' 이었다. 자살이라고 판단 한 근거는 현장에 함께 있었던, 살인 혐의를 받고 있던 방여부씨의 진술뿐 이었다. 분명히 타살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방씨가 한양대 재직 당시 브로커 노릇을 한 적이 있고 이교수가 상명여대 총장의 장녀라는 점, 호텔에 함께 투숙했다는 점은 모두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낱낱의 사실들은 사건 당시의 상황. 원인과는 직접상관이 없다. "호텔.입시 브로커. 여교수. 자살 따위 말들에서 우리는 쉽게 대학 내부의 권력 관계나 입시 부정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기사를 읽어보면 입시부정이나 대학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내용도 나와있지 않아요. 처음부터 언론이 각본을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언론의 예단은 후속 기사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가령 사건을 수사하는 도중인 10월10일에 발행된 한 석간지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이진분 교수 의문사 사건을 수사중인 강원도 속초경찰서는 20일 이교수와 결혼 약속을 했다고 주장하는 제 3의 남자의 '이교수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며…'라는 제보를 받고 수사에 활기를 띠고 있다."나중에 이 제3의 남자는 이교수의 소꿉친구이자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보고서에서 학생들은 "익명의 제보자라고 쓰면 될것을 굳이 ' 제 3의 남자' 라고 표현한 까닭은 역시 언론이 이 사건을 남녀 관계로만 풀려는 시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치정 관계로 미리 결론을 내림으로써 사건을 성윤리적인 문제로 전환하려는 의도가 보였다는 주장이다. 앞서의 조간지는 19월5일 사회면에서는 '내연 방씨 입건 수사' 라는 제목의 기사를 , 그리고 10월 6일 사회면에서는 '여교수와 입시 브로커의 행로' 라는 제목의 기사를 각각 내보냄으로써 독자들의 시각을 고정시켰다. "내연 또는 행로 따위의 말을 동원한 기사를 읽는다면, 독자들은 이교수가 불륜 관계를 맺었고, 불륜 관계를 만들었기에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죽음의 책임은 결국 이교수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며 마치 사건의 전모를 다 알았다는 듯이 생각해 버립니다. 처음엔 우리도 그랬으니까요"내연이나 행로라는 낱말을 사용함으로써 언론의 각본은 완성되어 '가정을 갖고 있는 주부가 외간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를 비관하다가 자살했다' 는 내용이 된다.

 물론 이교수의 죽임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오른쪽 가슴뼈와 갈비뼈 5개가 부서져 있고 심장내 출혈이 있는 등 이교수가 추락 직전에 이미 치사 상태였다는 부검 결과에 따라 방씨가 폭행 사실은 시인했지만, 살인 부분은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으로 연장되었지만, 경찰은 일단 방씨가 이교수를 폭행해 실신시킨 후 호텔 아래로 던져 숨지게 한 것으로 수사를 결론지었다. 법의학에서는 숨이 끊어진 상태를 죽음으로 보냈지만, 사건을 조사한 학생들에게 중요한 사실은 호텔에서 떨어지기 이전에 치사 상태에 이르도록 폭행을 당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에게 이것은 살인이다.

 그러나 이교수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이미 활자화환 언론 보도를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생들은 "이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를 읽으면서 부관참시라는 말을 떠올렸다"고 진술한다. 이들은 이번 작업을 통해서 가정의 윤리라는 사회규범을 이용해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은폐하려는 남성 중심적인 가치관이 기사 속에 용해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결국 언론 보도에 의해서 '그러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게끔 왜 먼저 불륜을 저질렀는가'라는 윤리적인 비난을 여자는 피할 수 가 없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책임까지 이교수에게로, 한 여성에게로 떠넘겨지고 있는 것이지요. 과연 여자는 때리고 죽여도 괜찮은 존재입니까."
 학생들이 보기에 사건의 핵심은 이교수가 남자 문제로 죽었다는 점이 아니라, 남자에게 가혹하게 폭행당하고 살해당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많은 언론이 그러한 점을 소홀하게 다루거나 침묵을 지켰고 내연 관계. 남녀 문제로 사건을 몰아갔다. 보고서에서 이들은 사회와 언론을 향해 이렇게 반문한다." 그러한 침묵은 가부장적 폭력에 대해 묵인하고 방조하는 것이 아닌가?"
 吳民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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