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책의 운명을 좌우한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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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룡씨 평론 · · · 저자명 · 서문 등 ‘책 주변’ 조명



제목은 책의 운명을 좌우한다. 책의 내용(텍스트)이 아닌 주변사항(주변 텍스트)이 책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제목과 더불어 저자이름 · 서문 등 책 속으로의 ‘진입과정’과 후기 · 해설 · 연보 등 내용을 명확하게 해주는 ‘탈출과정’의 중요성을 조명한 평론이 발표되어 출판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작가세계》여름호에 <파라텍스트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글에서 필자 이재룡씨(건국대 불문과 강사)는 “현실적으로 (제목 등의) 파라(para · 주변)의 세계를 지나지 않고는 결코 텍스트에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동안 텍스트에 집중되었던 시선을 좀더 넓혀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평론에 따르면, 주변 텍스트 중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제목은 텍스트의 최전방에서 사회와의 연결을 모색하는 첨병이며 호객 행위를 하는 간판이다. “제목은 포주이다”라는 프룬티에의 단언은 우리 책시장을 둘러봐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목은 책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저자에게는 창조 행위를 촉발하고 마무리짓게 하는 記號의 무리를 이끄는 깃발이다.

 

제목은 감상의 대상이며 반성의 대상

 제라르 주네트는 제목의 기능을 지칭 · 요약 · 유혹 세가지로 정의한다. 제목이 책의 총체성을 세가지로 정의한다. 제목이 책의 총체성을 요약하는 기능을 한다면, 부제와 장르 표기는 작품을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고 해석 방향을 지시하는 구실을 한다. 즉 독자와의 일종의 계약이라는 것이다.《동의보감》과 《소설 동의보감》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모든 책에 제목이나 저자명을 쓰는 것은 책의 역사에 견주면 최근 현상이다. 기명은 저자가 책의 내용을 보증하고 책임지겠다는 명시적 선언 행위이다. 필명은 기명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띤다. 필명은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의 수용과 해석에 큰 영향을 준다. 그 좋은 예로 장르 간의 이동을 위해 평론가 류철균씨가 소설가로 데뷔하면서 이인화라는 필명을 쓴 것과 ‘박해받은 노동자 해방’이라는 뜻을 함축한 박노해(본명 박기평)라는 필명을 들을 수 있다.

 제목 · 소제목과 다른 위상을 갖는 주변 텍스트 요소로 서문과 에피그라프(題訶)가 있다. 대개 인용 형식을 띤 에피그라프는 텍스트의 의미를 강화하거나 정반대의 우상파괴적인 효과를 낳기도 하며, 여운을 남겨 텍스트의 의미를 암시하기도 한다. 서문과 후기는 텍스트와 저자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기능을 하면서 때로는 평론가나 대중의 비판에 대응하는 변론으로도 작용한다.

 제목 · 표지 등 주변 텍스트는 어떤 경우에는 내용과 거의 관계없이 사회적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독자는 내용에 참여하지 않은 채 ‘주변을 산책하는 자’가 누리는 행복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 마취적 위력을 행사하는 제목은 감상의 대상인 동시에 우리에게 반성을 요구한다. “책의 홍수, 그것은 대부분의 독자에겐 제목의 홍수이기에 그렇다”라고 이재룡씨는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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