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으로부터 해방된 현실
  • 파리 · 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3.12.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랑스 민중 신문<리베라시옹> 마오주의 사라져 … 광고 싣고 월급도 차등 지급


올해는 모택동 출생 1백주년. 이따금씩 문화혁명만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 되살아나 잊혀져가는 기억을 자극할 뿐, 모택동 탄생 1백주년이라고 해서 특별한 기념 행사도 열리지 않는 프랑스 사회에 아직도 모택동 주의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프랑스에서 마오주의을 표방하는 정치 단체가 처음 등장한 것은 67년 12월‘프랑스 마르크스 · 레닌주의 공산당’이 결성되면서부터이다. 이 마오주의자 그룹은 후에 사르트르의 비서가 된 피에르 빅토르를 필두로 프랑스 최고 명문 가운데 하나인 파리 고등사범하교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는 얼마전 타계한 세계적 마르트스주의 사상가 루이 알튀헤르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68년 6월 프랑스 정부가 마오주의 조직을 강제 해산하자 마오주의자들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 가운데 기존 부르주아 언론을 개탄하면서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신문을 만들고자 하는 마오주의자들의 숙원은 71년 6월‘해방통신’이라는 토인사에서 첫 결실을 맺었다.‘진실을 밝히며, 자유로운 정보를 보다 많이 발굴하며, 명령에 의한 전보를 공격한다’는 취지로 어렵게 발족한 해방통신은 전국의 마오주의 출판물들에 노동자의 실태를 폭로하는 정보를 공급했다. 통신사에서 일간지로 전환하는 데에는 철저한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민중의 말 구어체로 기사 작성
 새로이 태어나게 된 일간지 <리베라시옹>발행인에는 당대 최고의 참여파 지식인 사르트르가 추대됐고, 미셸 푸토 · 모리스 클라벨 · 클로드 모리악 같은 지식인들이 절대적인 지원을 했다. 거듭되는 준비호에 이어 73년 5월 마침내 지령 1호를 띄운 <리베라시옹>은, 창간 자체만으로도 프랑스 언론사에 무수한 신기원을 이룩했다. 모든 정보는 민중으로부터 나와 민중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조를 실천하기 위해 광고와 외부 자본 참여를 일절 허용한지 않았으며, 필요한 자본은 직원들의 호주머니를 털거나 가두 모금으로 충당했다. 모든 결정은 직원 총회를 통해 결정되므로 직급에 따른 위계 질서가 필요없었다. 전직원이 동일한 액수의 월급(당시 파리 지역 일반 공장 노동자의 월급)을 받았고, 편집진과 인쇄 · 제작팀은 순환 근무를 했다. 공장 노동자 · 죄수 · 동성연애자 등 이제까지 한번도 신문지사에서 발언권을 가져보지 못했던 자들에 대한 섹스 · 로큰롤 등 금기로 여겨지던 사회 문제들이 버젓이 지면을 차지하게 됐다.

민중에게로 좀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민중의 말 즉 구어체로 기사를 작성한 것도 <리베라시옹>이 효시였고, 독자를 위해 무료 광고란을 마련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이른바‘리베 스타일’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유토피아적 시도는 현실적 제약과 양립하기 어려웠다. 창간 1년이 채 못되어 창간 당시 필진의 상당수가 <리베라시옹>을 떠났다. 프로 정신에 입각한 진정한 일간 신문으로 탈바꿈하자는 직원대다수의 의견에 따라 재탄생을 기약하며 마지막 호를 발간했다. 당시 언론이‘눈속임 할복 자살’‘집단 자살’이라고 표현했던 <리베라시옹>의 자진 폐간을 가리켜 세르쥬 쥘리는 <리베라시옹>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고 회고했다. 81년 5월 사회당 출신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서사시 <리베라시옹>의 2막이 시작됐다. 그러나 새 편집진에서는 왕년의 마오주의의 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광고 없는 신문 <리베라시옹>에 첫 광고가 등장한 것은 82년. 신문 부수으 대폭적인 증가에 따라 대자본이 필요해지자 외부 주주가 등장하게 됐고, 월급 지급에도 차등이 생겼다.

구습을 타파한다는 의미에서대대적인 문화혁명을 거친 셈이다. 당돌하고 때로는 무례하기까지 한 자유분방함을 예외로 친다면 <리베라시옹>은 창간 당시 공격 표적이었던 부르주아 신문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이를 두고‘<리베>는 죽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편집장 세르쥬 쥘리는“신문과 사회는 서록,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바뀌면 신문도 바뀌어댜 마땅하며“진정한 사회 전복은 진실한 정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하고 강조한다. 진실한, 아니 진실에 가장 가까운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아침마다 새로 태어나는 신문은 그날 그날 하나의 혁명을 시도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항구적 혁명을 외치던 극촤 운동가들의 이념은 아직도 <리베라시옹>의 저류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