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吉男 사건과 나’
  • 편집국 ()
  • 승인 1992.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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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吉男씨 입북과 관련, 尹伊桑씨가 6월16일 ≪시사저널≫에 보내온 해명서



 최근 남한에서는 재독교포였던 오길남이 남한에 ‘재망명’한 데 대해 한국의 전보도계가 대대적으로 취급하고, 심지어 외국까지 전파되어 (미국의 텔레비 등등) 여기에 집중적으로 나 윤이상과 송두율 박사에 대해 공세를 퍼부었다. 다음은 그와 관련한 진상이다.

 나와 오길남의 관계

 1977년 봄에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한민련 국제회의가 열렸을 때 처음으로 오길남을 먼발치에서 보았다. 그뒤 그의 이름은 들은바 있어도 가까이 만난 일은 없었다.

 그와의 인간적 관계

 86년 11월 어느날 저녁에 전화가 결려왔다. “선생님, 저는 오길남입니다. 이북에서 도망해 왔습니다”하였다. 나는 가기 이북에 간지를 전연 몰랐으며, 또 도망해 왔다는 사실도 보통 있는 일이 아니라 놀라서 물었다. “제가 가족을 데리고 이북에 살러 갔다가 6개월 전에 혼자 도망해 왔습니다” 그럼 6개월 동안 어디에 있다가 지금 전화를 거느냐고 물으니 미국과 독일의 정보기관에 갇혀 조사를 받고 이제 나왔다고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당황했다. “선생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 가족을 도와주십시오”하고 탄원하면서 울었다.

 그후에 내가 이북에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여러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수없이 걸겨왔으며, 그 가족을 구출을 역설하였다. 그후 몇차례 오에게서 듣기로, 한국사람에게 이북행을 말하면 탄로날까봐 독일인 목사 한사람에게만 얘기하고 떠났다고 말하였다. 나와 아내는 베를린 주재 이북 연락관을 찾아서 오의 가족의 서독귀환 가능성을 타진하고 서독 교포 대부분의 의사가 그러니 본국에 교섭하도록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 사건을 협의차 본국에 가서 1개월 후에 돌아온 그 연락관은 “본국의 태도는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서 “오길남이 조국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다”고 말하였다. 이와 비슷한 교섭이 몇번 있는 후 하노퍼에서 내 음악회가 있을 때 그곳에 살고 있는 오길남을 나의 호델로 불렀다. 이때가 생전 처음으로 나와 오길남의 단독대면이었다. 나는 그의 처지에 동정하고 위로하고 그동안의 교섭 경과를 설명하고 그에게 생활비 보조로서 돈도 주었다.

 87년 9월 해마다 평양에서 열리는 ‘윤이상 음악제’에 참석차 유럽의 저명한 외국인 연주자와 평양에 갔을 때 오길남 가족을 서독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그곳의 최고실무책임자와 담판을 하였다. 그때 그가 나에게 한 말은 ①오길남은 방문차 온 사람이 아니라 우리나라 공민이 되어 가족을 데리고 이삿짐을 크게 꾸려왔으므로 우리 법에 따라 다룰 수밖에 없다(오는 그곳에서 차관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②그가 출국할 때 모든 것을 속이고 갔으며 코펜하겐공항에서 그곳 경찰에게 조선인민공화국의 간첩이라고 하였다 ③그후 미국 비밀경찰과 독일 정보당국에 6개월 동안이나 취조를 받고 많은 우리나라 정보를 제공했다. ④이상과 같이 오씨는 우리나라의 법 규정에 따라 위법행위를 저질렀으므로 응당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 오는 우리나라 위신을 국제적으로 실추시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선 인도적 차원에서 그의 가족 소식이라도 전해달라고 해서 간신히 부인의 편지 한장을 받아와 오씨를 베를린의 집에 불러 위와 같은 이북당국의 태도를 전하고 부인의 편지를 주었다.

 90년 10월 나와 아내는 민족통일음악제를 위하여 평양을 방문한다. 이것을 안 오길남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눈물로 가족문제를 호소하였다. 아내는 책임은 질 수 없지만 가족 소식이라도 가져오도록 노력하겠다고 일렀다. (중략)

 91년 1월 중순 베를린으로 돌아온 우리 부부는 곧 이 기쁜 소식을 오길남에게 전하려고 그를 우리집으로 불렀다. 퍽 밝고 쾌활한 태도로 우리 집에 들어온 오길남은 선물로 전해받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내의 간절하고 확실한 소리, 두 딸의 애절한 목소리를 듣고도 태연하였다.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내 아내를 보고도 감각이 없었다. 그리고 가족사진을 보고 “왜 아이들이 못났는가…”하면서 히히덕거렸다. 나는 그가 그 자리에서 통곡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가족 찾는 것을 단념하였습니다”고 잘라 말하였다. 나는 그자리에서 호통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쫓아내다시피하였다. 이것이 그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상은 나의 속임 없는 진술의 전부이며, 남한 정보기관이 나에게 책임을 돌린 사항들, 즉 ①오가 이북 갈 것을 적극 권했다. ②오가 이북을 탈출한 뒤 다시 돌아갈 것을 강요했다. ③오는 미국의 고정간첩이며 경거망동하면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하였다 ④윤이상음악연구소는 대남방속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윤이상연구소는 행정부인 문화선전부 소속이며 이 연구소에 이북의 대중가요·행진곡 등은 전혀 비치되어 있지 않다) 따위는 전적으로 정치 조작이며 이 이면에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엄천난 모략이 숨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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