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개방, 미국이 죽 쒀서 중국 준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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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인이 번다’ 한국과 일본 쌀시장에 대한 미국의 개방 압력을 빗대 농업학자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다. 미국이 고생해서 한국과 일본 시장을 열어 놓으면 결국은 중국인들이 들어와 돈을 긁어갈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농업만 피해를 보게 된다는 비관적 전망도 곁들여진다. 나름대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 농업은 버틸 수 있다고 평가된다.

 국내 농업 전문가들은 쌀 개방과 관련한 미국의 계산은 처음부터 상당히 빗나간 것이었다고 본다. 이는 현재 미국 내에서 쌀시장 개방 압력을 넣고 있는 세력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미국의 쌀 개방 압력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압력이 한국과 입본에서 주로 먹는 자포니카 계열 쌀의 주생산지인 캐리포니아 지역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주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인디카 계열 쌀의 주산지인 미시시피 강 하류 유역의 남부 농업지대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쌀은 생산 지역의 기후·형태·맛 등에 따라 크게 나누어 인디카와 자포니카 계통으로 구분한다. 현재 세계에서 생산되는 쌀의 90%는 주로 아열대성 기후에서 재배되는 인디카 계통 쌀인데 길이가 길고(장립종) 맛이 가칠까칠한 것이 특징이다. 보통 안남미라고 하는 쌀이 이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이 주식으로 하는 자포니카는 인디카에 비해 길이가 짧고(단립종) 맛이 구수하고 찰지다.

 그동안 쌀시장 개방이 문제돼 왔던 것은 바로 자포니카 계통 쌀을 주식으로 하지 않으면서 이 쌀을 생산하고 있는 국가들 때문이었다. 자포니카 쌀의 주산지인 한국과 일본을 포함해 미국 캘리포니아, 호주 동부, 중국 동북지구로 구분되는데, 자국에서 이 쌀이 남아도는 미국과 호주가 한국과 일본의 높은 쌀값을 노리고 시장을 개방하라고 포문을 연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미국내 개방 압력 세력도 캘리포니아 일대의 자포니카 생산지역이 되어야 옳다. 현재 이곳에서는 약 17만ha의 경작 지역에서 자포니카 계열 쌀이 약 1백만t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현지를 조사한 국내 농업학자들에 따르면, 오히려 캘리포니아 지역은 쌀시장 개방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쌀시장이 개방되어도 지금보다 더 많은 쌀을 생산할 여력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현재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쌀의 증산을 어렵게 하는 몇가지 제약이 있다. 그중에 한가지는 환경 문제다. 한국의 벼농사는 환경보호 산업이지만, 캘리포니아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시민의 식수원인 새크라멘토 강을 오염시키고, 가을에 볏짚을 태움으로써 공기를 오염시키는 환견파괴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캘리포니아는 미국 최대의 원예작물 생산지로 수익성이 높은 작물이 얼마든지 있어 벼농사의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오히려 이곳 농민들은 한국과 일본의 쌀시장 개방에 대해 다소 불안해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현재 미국 정부가 쌀에 대한 감산 정책을 펴면서 농민들에게 주고 있는 보조금이 쌀시장 개방으로 없어질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미 농민들, 한·일 시장 개방 오히려 불안
 이러한 농민 정서는 인디카 쌀의 주산지인 아칸소·루이지애나·미시시피·텍사스 등 미국 남부 농업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곳 농민들은 한국과 일본의 쌀시장이 개방되면, 인디카 대신 자포니카 계통 쌀을 심어야 하는테, 미국에서는 자포니카가 인디카보다 값이 싸기 때문에 쌀시장 개방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고 한다. 지난 89년도에 아칸소 주의 인디카 쌀은 t당 2백14달러였는데, 캘리포니아산 자포니카 쌀 t당 가격은 1백90달러였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쌀시장이 개방되면 자포니카 쌀의 국제 가격이 폭등할 가능성도 있지만, 소비 시장 자체가 두나라에 국한하기 때문에 앞날이 매우 불안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쌀시장 개방 압력은 한국이나 일본인의 식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일반 농민들의 의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와는 별로 상관도 없는 엉뚱한 제3세력이 쌀 개방의 배후 세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제3세력이 바로 미국 쌀의 수출에 의존해서 연명하는 도정업체와, 수출 관계 로비단체 들이다. 미국의 정미소는 한국과 일본의 정미소와 크게 다르다. 한국과 일본의 정미소가 정미만을 하는 데 반해, 미국 정미소는 도정에서부터 포장 · 판매까지 도맡아 한다. 현재 미국에는 대규모 정미업소가 전국에 30여개 있는데, 이들은 ‘미국도정협회(RMA)’라는 전국조직에 속해 있다.

가장 강력한 ‘배후’는 미 남부 정미업자들
 미국도정협회의 원래 사업목적은 회원사에 대한 서비스 제공, 정보 수집, 쌀의 품질 관리 등이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미국 쌀의 해외수출이 격감돼 재고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자, 적극적인 로비단체로 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84년 쌀 관련 수출업자·브로커·공업자·창고업자·선적업자와 정미기계 제조업자가 준회원으로 참가하면서부터는 이런 성격이 더 뚜렷해졌다.

 그동안 미국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단체가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을 86년9월 일본 쌀시장의 폐쇄성을 비난하며, 일본이 미국의 74년도 슈퍼 301조를 위반했다고 제소하면서부터이다. 미국 정부는 도정협회의 재소를 일단 기각했지만, 이를 계기로 쌀시장 문제가 가트의 협상 테이블에 상정됐고, 결국 최근의 우루과이 라운드까지 오게 되었다. 미국도정협회내에서도 특히 아칸소 주 동 남부 지역 정미업자들이 한국과 일본의 쌀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일본 쌀시장 개방 압력의 주역 노릇을 했다고 알려진 칼 부라더스라는 사람이 현재 남부 최대의 정미회사인 아칸소 주의 ‘라이스 랜드’ 사 부사장으로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미국도정협회와 상호 보완적인 단체로 ‘쌀 이사회(Rice Council)'가 있다. 57년 남부 지역 쌀생산 5개 주의 쌀소비촉진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된 이 단체는 쌀의 국내의 판로 개척을 주요한 설립목적으로 하고 있다. 활동 자금은 남부 지역 농민들이 수확기에 일정액씩 모금하는 ’체크오브‘ 기금과 미국 농무성의 지원자금, 그리고 정미업자들의 기부금으로 충당된다.
 이 단체는 해마다 수백만달러의 예산 중 적어도 백만달러 이상을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로비 자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 90년의 경우 전체 예산 약 4백50만달러 중 1백24만달러가 해외 시장 개척용 자금이었다. 이 자금은 주로 쌀 수입국의 주요 기관이나 인사들을 미국 쌀 수입론자로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한다.

 ‘쌀 이사회’가 지난 90년 작성한 한 보고서는 이 단체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88년부터 3년 동안 일본 국민을 상대로 홍보한 결과 쌀 개방 찬성률이 99년 38%에서 91년 65%까지 올랐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곳 이 단체가 일본 내에서 쌀 개방 대세론을 형성하는 여론 조작에 직접 관여했다는 점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일본과 사정이 비슷한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론 형성 작업을 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압력단체들은 주로 민주당 소속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은 고령인 데다 다선인 의원이 많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 남부 지역 로비 단체가 한국과 일본의 쌀시장 개방을 집요하게 요구해온 이유는 남부지방에서 주로 생산해온 인디카 계통 쌀의 해외시장 관로가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인디카 쌀의 주수입국은 동남아 등 제3세계 국가들이었는데, 이들이 70년대의 녹색혁명을 통해 자급자족을 달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국가의 쌀값 수준이 미국쌀보다 낮으면 낮았지 높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파고들 여지가 없어졌다. 이런 연유로 80년대 초부터 남부지역은 남아도는 인디카 쌀을 처리하는 데 고심했고, 미국 정부는 보조금까지 주어가면서 감산정책을 추진했다. 수출 물량 축소 및 감산 정책으로 인한 물동량 감소는 쌀에 의존해 지탱하는 도정업체들과 ‘쌀 이사회’등에 위기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자포니카 아닌 인디카 쌀 수출단체들이 ‘엉뚱하게’ 압력
 이때부터 그들은 전략을 수정했다. 아직도 높은 수준의 국내 쌀값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 등 자포니카 쌀 소비 국가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자포니카를 주식으로 하는 한국과 일본 시장에 진출하려면 남부 지역에서도 자포니카 쌀을 생산해야 한다. 남부지역은 캘리포니아와 달리 전형적인 농업 지역이기 때문에 경작지를 늘릴 여지가 많다. 또 아칸소 주는 80년대 초에 자포니카를 제배했던 경험도 있다. 남부 지방에 맞는 자포니카 육종 사업도 아칸소 주립대학 육종연구소 등을 통해 차근차근 진행돼 왔다. 지난해 2월 농협대학의 박진환 전 학장과 농협 조사부 고영곤 차장이 현지를 방문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미 마아스·오리온·리코-1 등으로 명명된 자포니카 품종이 개발 완료됐다고 한다.

 그런데 중대한 문제가 한가지 있다. 그것은 이들 남부 지역에서 생산된 자포니카 쌀의 밥맛이다. 이 지역은 인디카 쌀 재배에 맞는 아열대성 기후 지대이다. 이 기후에서 자포니카 쌀을 생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밥맛이 제대노 나지 않는 게 흠이다. 밥맛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일교차라고 한다. 캐리포니아는 일교파가 크기 때문에 칼로스처럼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쌀을 생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남부에서 생산되는 자포니카는 일정 수준까지는 가능하겠으나 아주 고급 쌀은 힘들다는 것이다. 박진환 학장팀이 이곳을 방문해 시판중인 마아스로 밥을 해 먹어본 결과, 밥맛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인디카 혈통이 섞여 있어 파삭파삭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 점이 바로 문제다. 웬만큼 수준은 되나 완전 고급종은 어렵다는 것이 남부지역 자포니카의 한계이다. 미국에서 일본 시장을 겨냥해 쌀 개방 압력을 행사해 왔지만, 정작 일본 시장은 공략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한국 시장만 교란할 것이라고 국내 농업학자들은 걱정한다. 이는 일본 소비자들은 이미 오랜 기간 고급 쌀에 입맛이 길들여져 있어 미국 쌀이 아무리 값싸게 들어와도 밥맛이 좋은 일본 쌀을 선호하겠지만, 한국의 소비자들은 좋은 쌀을 먹기 시작한 역사가 짧아 값싼 미국 쌀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중국쌀, 미국산 반값…운송거리도 짧아
 한국이나 일본 쌀시장에 미국 쌀과 호주 쌀만 들어온다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캘리포니아 쌀이 현재 1백만~1백30만t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남부 농업지대가 약 3백만t, 그리고 호주가 1백50만t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면 전부 6백30만t 정도이다. 한국의 쌀 소비량 5백만t과 일본의 소비량 1천만t을 합친 것의 반에 약간 못미친다. 그리고 이 쌀이 전부 수입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쌀시장이 완전 개방될 경우 중국에서 값싼 쌀이 밀려올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중국산 자포니카 쌀은 주로 조선족이 많이 사는 동북3성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한국과 일본의 쌀시장 개방이 거론되면서 양자강 하류 안휘성·절강성 에서도 자포니카 쌀 재배량이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아칸소 주립대학의 매릴 웨일즈 교수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자포니카 쌀의 총생산량을 2천만t 정도로 추산했다. 가격 면에서도 80kg 한 가마니당 약 1만원 정도로 미국 쌀의 반값에 해당하고, 운송 거리는 미국 쌀에 비해 훨씬 짧다. 결국 쌀시장이 완전 개방될 경우 일본은 몰라도 한국 시장을 완전 장악하는 것은 미국 쌀이 아니라 중국 쌀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불문가지인 것이다.

 한국 쌀시장이 미국 요구대로 완전 개방되면, 쌀 개방 압력 세력인 남부의 로비단체들은, 짧은 기간은 재미를 보겠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면, 한국 농촌을 파괴한 주범이라는 낙인만 찍힌 채 빈털터리로 한국 시장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미국의 농업경제학자들이 발표한 연구논문들을 살펴보면, 미국에서도 학자들은 이미 2~3년 전부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칸소 주립대학의 웨일즈 교수이다. 미국 정부도 이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국내 농업 전문가들 중에는, 최근 미국이 한국·일본과의 쌀시장 협상에서 완전 개방을 뒤로 미루는 대신 최소시장 접근 폭을 넓히라고 주장한 이면에는 나름대로 이같은 손익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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