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청 고려 의병대' 투쟁 기록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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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 사회당지도자 아래 조직된 고려인 적위군 다음의 연해주의 고려인 군대로는 수청 의병대가 가장 먼저 조직되었고 연혁도 복잡하다.
 1917년 전에도 연해주 고려인 비밀혁명단체로 '철혈단'이 존재했다. 이 단체는 고려 민족의 청년들을 결속하여 미래의 독립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다.

 17년 초기가 되자 수청온영에 있는 러시아 의병대와 교섭하여 고려인 군대 조직과 각 지방에서의 비밀 선전을 협의한 후 지방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10월 혁명 이후에 각 민족의 평등 자유가 실현됨에 따라 수청 지방에도 고려인총연합회가 조작되고 인민자치와 고려 청년 동지의 규합을 사업의 중심으로 하였다. 러시아 각지의 '철혈단' 주모자는 2백75명에 달했다.

 18년 가을에는 서북간도 비밀 결사인 고려민족 광복단과 연합했다. 1919년 31운동이 지난 뒤 한창걸 등 5~8명을 러시아 의병대에 참가시키고 그 해 5월께 한창걸로부터 수청 평사우재에 있는 러시아 혁명군 본부에 가서 참모장 시느리켄, 사령관이 이바노프 브로호프 셰브첸코와 협의하여 군사 및 민사에 관한 14개의 비밀 조건을 협정하고 각 지방에 지방대를 설치하니 그 숫자가 3천7백여 명이며, 러시아 혁명군에 참가한 자가 50여 명이다. 그 해 가을 연합군과 백파의 공세가 급하게 되자 이들은 산간으로 흩어졌다가 9월께 다시 신영동에서 1백50여 동지가 모여 한창걸을 사령관으로, 채용동을 참모장으로, 김만겸등 38명을 대표로 정해 치우머의 러시아 군대 참모부와 교섭하여 각처에 있는 고려 군대를 치우머에 주둔하게 하니 총인원 2백50여 명이었다. 그러나 20년 3월 이후 백파와 연합군의 반동이 심하여 수세에 몰렸다.

 그 해 10월께 간도로부터 온 박경철 리승조 등 58명(신민단 군인)과 도병하로부터 온 한창걸이병수 등 98명, 수청에서 온 강백우(지방단 위원) 등 몇 사람이 수주허혼두거우에 모여 고려 노농군회를 조직하였다. 회장 박경철, 군무 한창걸, 재무 이승조, 민사 강백우, 교육 강호여, 선전 우시헌이었다.

 21년 10월께 혈성단 대표 강국모 등 몇 사람으로부터 두 단체의 연합과 사관생도 양성 문제를 협의한 결과, 수청에 있는 김경천에게 군무를 맡기고 사관을 양성할 지점을 스레치폭친으로 정하고 회명을 '연해주 한인총회'라고쳤다. 이상 여러 단체가 합하여 '수청 고려의병대'라는 단일 명칭을 갖게 되었다.

수청 전쟁
 21년 9월 러시아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고려 의병대 1중대(중대장 신용걸)은 올가항을 수비하게 되고, 그 나머지는 김경천의 영솔하에 어수치노(도병하)로 나갔다.
 10월에 고려 군대는 러시아 군대와 합하여 수청에 있는 백파를 습격하다가 적의 화력을 이기지 못하여 역습당했다. 군사들은 괴멸되고 김경천은 기병 몇 명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향했다. 당시 한창걸을 임시 사령관으로 하고 박창학을 임시참모, 고상준 왕재호를 임시군자금 감독으로 삼았다.

올가항 전쟁
 그 해 10월 을가항 전투에서 본 항구의 고려중대가 제1전투선에서 8백여 명이나 되는 백군에게 포위를 당하여 소대장 김 식이 죽었다. 10월 15일 다시 두 소대로 나누어 한 소대는 윤도길, 한 소대는 신용걸이 지휘하여 9시간 동안이나 악전고투하였으나 겨우 3백50명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적 8백명을 당하기 어려웠다. 거의 다 죽고 50명 남은 군인을 데리고 산으로 퇴각했다. 이튿날 올가항에 정박한 적함을 습격하여 적을 패주시키니 전세는 회복되었다. 이 싸움에서 고려 군인 22명과 러시아 군인 3명이 죽고 8명이 부상했다. 이 전쟁 후 남은 군인들은 중대장 임한준의 영솔 아래 올가항을 떠나 수주허로 돌아와서 다시 군세를 확충했다. 22년 1월께에는 군인수가 3백명에 달했다. 22년 4월 러시아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다시 올가항에 원정했다. 일반 군인들은 작년에 전사한 동지들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해 수주허 본영을 굳게 지키고, 한창걸박경철 두 사람은 2개 중대를 인솔, 올가항 부근에서 작전 계획을 세워 두길로 나누어 협공을 시작한 지 수십일 만에 백군을 격파하고 올가항을 점령했다.

새영 수비대 전투
 22년 7월 도병하에 주둔하는 러시아군 사령부에서 연해주 고려 의병대 군사대표회의를 소집했다. 수청 군대는 박경철을 대표로 보냈으나 교통이 불편해던 관계로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고, 다만 수청 군대를 도병하고 출동시키라는 명령과 군자금 2천2백루블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즉시 1개 중대를 나누어 수청수주허새영 오새를 지키게 하고, 기병 1중대보병 2중대포병 1분대는 한창걸박경철이 영솔하여 도병하로 출발했다.

 이 때 새영 수비대는 강운룡이 영솔한 바도병하 지방대와 협력하여 침입하는 백파 기병대와 집전해 10여 명의 적을 죽이고 다수의 군수품, 말 13필, 기병총 3정, 군포 5개를 노획했다. 강운룡(알렉세이) 죽음.

이표허동령 전쟁
 22년 3월에 들어 연해주 각처에 있는 의병대가 모두 합하여 백파 군대를 총공격했다.
 치머우 군대와 수청군 기병대는 셰브첸코군대와 합하여 야리채를, 수청군 2개 중대는 체르니소브 군대와 합하여 이표허동령을 진격하여 수십 차례 공방 끝에 마침내 백군을 격파하고 기병대는 허미탕까지 추격했다. 외교상 수청군대는 본지로 돌아가라는 총사령부 명령으로 회군했다. 이 전쟁에서 김용철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생명을 건져 기적적으로 돌아왔다.

 그후 연해주 의병대가 모두 해산될 때 수청 군대도 해산되었다. 그 뒤에 작업자를 모집하여 농업콜호스를 조직하고 군내에서 쓰던 재봉기말 등을 인계하고 고상중에게 인수하게 하니 지금의 치우머콜호스가 바로 그것이다. 수청 군대는 또 중국 마적들을 토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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