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사건 끝장내자”
  • 이성남 편집부 차장대우 ()
  • 승인 1992.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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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작곡가 윤이상씨 / “내 가족 외에 북한행 권한 적 없다”

 

 

 입북·재망명한 ???씨의 “윤이상·송두율씨가 입북 권했다”는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두 재독인사는 오씨의 발언에 즉각 반박성명을 낸 데 이어 작곡가 ???씨는 지난 6월16일 《시사저널》과 《월간조선》에 게재된 오씨의 수기와 인터뷰를 다 읽었다는 윤씨는 이것으로 “오길남 사건을 끝장내고” 작곡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편집자〉

 

86년 11월 오씨가 북한탈출 사실을 전화로 알려오기 전까지 “그가 이북에 간지를 전연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시의 주장은 85년 7월 박사학위 논문을 선생께 증정했고, 이어 “그 해박한 지식으로 북한에 들어가 경제발전과 조국통일에 이바지하는 일을 해주면 좋겠다”는 화신을 받았다고 합니다. 누구 말이 맞습니까?

다시 한번 딱 잘라 말하지만 그가 이북으로 가는 것을 나는 전연 몰랐습니다. “북한에 들어가…”라는 나의 감사편지 내용은 허위입니다. 나는 오늘까지 내 가족 이외에 우리 동족 그 누구에게도 북한행을 권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를 인간으로서 잘 모르면서 어떻게 그런 것을 권고합니까.

 

오씨 가족의 서독 귀환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가 코펜하겐에서 외국기관과 상관하지 않고 공항에서 조용히 탈출하여 잠적중에도 가족구출에만 힘썼으면 우리의 구출사업도 성공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는 가족을 구출하려 하면서도 온데에다 이북정부를 불쾌히 자극시키는 말을 전화로나 구두로나 많이 했고 그것이 이북정부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사실도 가족구출이 실패된 원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87년 9월 평양의 ‘윤이상 음악제’에 참석할 때는 “북한의 최고실무 책임자와 담판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 대상자는 누구입니까?

교섭의 최고대상자는 허담 비서였습니다.

 

당시 북측은 북의 위신을 국제적으로 추락시킨 오씨에 대해 “위법행위를 저질렀으므로 응당 법적인 절차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북 당국의 그같은 강경 입장을 잘 알면서도 오씨에게 북한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지는 않았습니까? 오씨는 수기에서 88년 가을에 아내의 편지를 전해주며 “북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오길남은 가족이 나올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을 알고 자진해서 몇 번 이북 귀환의 의사를 비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주 변동되기 때문에 도조히 믿을 수가 없었지요. 그는 퍽 겁쟁이같이 보였습니다. 나는 그의 결심이 강하다고 느꼈을 때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가족을 생각해서이지 이북을 돕기 위해서는 절대로 아니였습니다.

 

‘이북에 가라’ 또 ‘다시 돌아가라’라는 두 가지 말이 한국에서는 그렇게 커다란 사건처럼 취급되는 것을 보고 서양사회에 사는 나는 다시 한번 놀라고 있다. ‘소련으로…’라고 했다면 문제가 안 되었을 텐데…. 아직도 이런 상태라면 민족의 화해도, 통일도, ‘신뢰구축’도 요원하지 않은가.

오씨 가족의 서신 및 육성이 담긴 테이프·편지 등을 다만 “인도적인 의미에서만” 전달해 저었습니까? 혹시 그같은 방법이 오씨에게 재입북을 결심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이북 당국은 나에게 한번도 오길남을 돌려보내는 데 협력해달라고 부탁한 일 없습니다. 나의 성미는 정치적으로 누가 나에게 부탁하면 자존심이 크게 상하게 되어서 그 반대의 일을 하는 때가 많습니다. 내가 오길남의 말을 꺼내면 그들은 늘 회피하곤 하였습니다. 나의 인상으로는 그들에게는 오길남이 잊혀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가족의 소식을 얻는 것도 퍽 힘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오길남의 가족구출 문제는 순전히 나의 인도적인 태도였습니다. 나는 ‘동백림 사건’ 때 어린아이들을 사고무친한 이 서유럽땅에 버려 두고 아내와 더불어 한국에 갇혀 있던 생각을 그때 늘 했습니다.

 

오씨는 윤선생이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자라며 김일성을 존경한다고 했다”고 수기에 썼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진 적이 있다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차이점은 어떤 것입니까?

이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말이 못됩니다. 그가 직접 확증한 재료도 아니며 내게 언 듯 들었다고 해서 공개하는 것도 한국의 설정으로 봐서 보통 같으면 삼가야 합니다. 나는 정치전문가가 아니며, 보편적으로 구태여 말한다면사회민주주의 정도입니다. 빌리 브란트도, 미테랑도, 일본의 도의 타카고도, 고 올로프 팔메도 내가 생각하는 정치노선과 같습니다. 잘라 말하면 과격사회주의자도 아니요. 더구나 공산주의자는 되어본 적이 없습니다.

 

범민족통일음악회와 송년통일음악회 개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번 사건이 음악교류의 걸림돌로 적용될 수 있습니까?

이번 사건은 나이 들고 병고에 시달리는 나에게서 많은 용기를 앗아갔습니다. 이제 ‘남’ 즉 타인을 위해 할 힘도 없습니다. 아마 내가 계획했던 큰 南北行事도 이제 나의 개입 하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이번 사건에 남한 정부의 반대 태도가 확인되었으니까요.

 

경남 충무가 고향인 선생께서 남으로부터 마음이 떠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무엇입니까? 반공 이데올로기의 제약으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이 조국의 하늘 아래서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 말이 옳소. 내가 다 못다한 일을 용기있고 지혜있고 힘있는 모든 후진들이 밀고나가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에게 하루라도 빨리 분단상태가 평화적 공존상태로 이어져가야 합니다. 나의 고향 ‘충무’는 산천은 변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사람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나는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탄생 75주기를 기려서 세계 각국에서 성대한 음악제가 잇따라 개최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음악인물은 “한 작품이라도 더 남겨야 하는 아까운 시간에” 오씨 사건에 신경을 빼앗겨야 하는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로서 분단조국에 하시고 싶은 말씀은?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보냅니다. 사실 내 나이에 건강이 나쁘면 으레 마음이 상하기가 쉬우며 그 때문에 한달 꼬박 병 앓고 작품을 전연 쓰지 못했습니다. 작품 쓸 게 밀려서 10월 초에 있을 음악회에 관현악고 하나, 실내악고 두 개를 8월 10일까지 써내야 합니다. 이제 이 ‘오길남’ 사건은 종결짓고 작품 써야겠소. 내가 민족에게 할 말은 무엇이냐고요? 할 말은 많은데 가슴이 벅차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 오길남과 나의 그 가족 구출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내가 직접 써보낸 다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내가 겪고 판단한 바에 따르면 그는 가지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50 평생 제손으로 돈을 번 적은 거의 없고, 장학금·병든 부인의 노동으로, 또 독이르이 사회보조금으로 살아왔다. 다시 말하면 한 가족을 꾸릴 자격도, 자식을 가질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생각해보라. 그는 네 번재 망명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서독으로, 서독에서 이북으로, 이부에서 서독으로, 그리고 서둑에서 이남으로. 말하자면 독일 속담처럼 ‘꿀과 우유가 흐르는 나라’만을 찾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처자식을 제2망명지에 떨어뜨려버렸다. 그가 처자를 데리고 이북으로 간 것이 잘못이오. 거기 갔으면 남처럼 살지(거기 2천만의 동족이 살지 않은가) 거기를 버리고 혼자사 큰 모험 끝에 서독으로 도망온 것도 잘못이오, 이제 또 남한으로 재망명가서 다시 큰 모험을 하지 않는가.

 그는 내가 누구를 위하여 그의 가족 구출운동을 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를 동정하고 가족구출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지금 와서 원수로 몰고 있다. 나는 그의 가족구출을 위해 여러 사람과 의논하였다. 지금은 한국에 가 있는 몇 사람도 있고 여기에도 독일인·한국인 합하여 약 20명이 나의 진의를 위해 증인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일까지 있었다. 내가 선두로 약 15명의 유능인사(한·독 포함)에게 우리가 이북정부에 보장서를 쓰고 그 가족을 서독으로 보내줄 것을 호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호소문에 서명할 사람은 나 외에 두사람밖에 없었다. 그들은 오길남이 그후에 어떠한 짓을 할는지 책임질 수 없다고 하였다.

 때를 명백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북의 요인과의 담판에서 그의 가족이 서독으로 나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만일 오길남이 다시 돌아오면 나를 믿고 처벌하지 않고 가족과 같이 살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은 해를 뛰어넘어 두 번쯤 있었다. 두 번 다 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와서 오의 태도에 신뢰성이 없어서 실현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나 마찬가지다. 한 인간으로서 가족밖에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나라면 나 혼자만을 위한 부귀영화도 박차고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눈물로 지내는 처자에게 돌아가겠다. 비록 식과 얼굴을 맞대고 살 수가 있다면 그것이 순수한 행복이요 가장 된 도리가 아닌가. 그러나 이런 말을 해서 후일에 증거로 남을까봐 딱 잘라 말하지 못하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나의 생각이 글렀느냐, 이북을 위해서 하는 말이냐고 묻고 싶다.

 오길남은 지금 남한에서 개서장군처럼 보도의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러는 동안 그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한걸음 또 멀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북에 가라” 또 “다시 돌아가라”라는 두 가지 말이 한국에서는 그렇게 커다란 사건처럼 취급되는 것을 보고 서양사회에 사는 나로서는 다시 한번 놀라고 있다. “소련으로…”라고 했다면 문제가 안되었을 텐데 “이북으로…” 한 까닭이다. 아직도 이런 상태라면 민족의 화해도, 통일도, ‘신뢰구축’도 요원하지 않은가. 오길남의 ‘정치적 불장난’에 심한 혐오를 느끼며, 그럴수록 그의 가족에 깊은 동정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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