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 산 넘어 또 시련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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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혹 떼려다 '극우' 혹 붙여 …막강 권한 행사 방법이 해법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또다시 정치적 시련을 겪을 것 같다. 지난 12일 실시한 총선 결과 극우 민족주의 세력인 자유민주당과 공산당 · 보수계정당들이 친옐친계 정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진했기 때문이다. 친옐친계인 '러시아의 선택당'은 17일 현재 94석을 얻어 78석을 얻은 자유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 자리를 확보했다. 그러나 전체 의석 4백50석의 안정과반수선인 2백30석에는 훨씬 못미쳐 앞으로 옐친 대통령은 정국을 운영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당수인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제일 큰 부담이다.

 13개 정당이 난립한 이번 선거 러시아 사상 첫 자유 총선인 데다 새 헌법안 통과에 대한 기부를 함께 물어 큰 관심을 모았다. 새헌법안은 유권자 60%이상이 찬성표를 던져 통과됐다. 옐친 대통령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런 결과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현재의 경제난과 정치 혼란에 불만을 품은 대다수 유권자가 민족주의 세력인 자유민주당과 공산당에 지지표를 던짐으로써 옐친 대통령에게 정치적 실패를 안겨 주었다. 특히'대러시아주의'를 내세우며 최근의 총제적 난국이 옐친 대통령의 실정 탓이라고 몰아붙인 자유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약진한 현상은 엘친의 노프스키 당수는 옛 소련 연방에서 독립한 발트 3국뿐 아니라 한때 러시아 제국의 속령인 핀란드와 알래스카까지 되돌려받아야 한다는 주창하는 극우 민족주의자다.

범개혁 세력 결집, 안정 의석 확보 급선무
 자유민주당이 다음 정권을 창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원내에 마련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러시아 연방 주변 국가들은 물론 미국 등 서방 세계까지 러시아의 장래를 크게 염려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기존 옐친 일변도 정책에서 벗어나 전면적으로 러시아 정책을 재검토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선거 전문가들은 이번 선거 결과 어느 정당도 원내 안정 과반수를 확보하기 힘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모두 4백50명을 뽑는 선거에서 절반은 정당 지지 투표로 의원을 뽑고, 나머지는 지역구 선거에서 단순 과반수로 선출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3개 정당 가운데 원내 진출선인 5% 이상의 유효 지지율을 얻은 정당은 8개다. 그 가운데 개혁 또는 중도 성향 정당은 예고르 가이다르 총리가 이끄는 러시아의 선택당, 개혁파인 세르게이 샤흐라이 부총리가 이끄는 '러시아의 연합과 화합당', 중도계인 그리고리 아블린스키가 이끄는 야블로코당 등이다. 반개혁 정당으로는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가 이끄는 자유민주당, 겐나디 쥬가노프가 이끄는 공산당과 농민당 등이 있다.

 주목할 것은 무소속 후보들이 1백명 이상 당선돼 정국의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제1당이 원내 안정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무소속 의원들의 입김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러시아의 선택당은 먼저 러시아의 연합과 화합당과 야블로코당 외에도 개혁파 무소속 의원을 영입해 범개혁 세력을 결집할 것으로 보인다.

 정당별 세력 판도는 처음 의회가 소집되는 내년 1월에 가야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옐친 정부는 팽팽히 맞서 있는 두마(하원)를 상대해야 할 것 같다. 러시아 연합과 화합당의 세르게이 샤흐라이 당수는, 새 의회가 당분간 극우 세력인 자유민주당과 개혁 정당인 러시아의 선택당의 대결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만일 극우 세력과 개혁 세력이 의회에서 대치 정국을 풀지 못하면 옐친의 정국 운용에도 큰 차질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옐친 대통령이 종전처럼 의회를 해산할 수 없다. 옐친 스스로가 원해서 실시한 총선인 데다 좋은 싫든 이번 선거를 통해 원내 교두보를 확보한 극우공산계 정당들은 민의의 심판을 받은 합법적인 정치 조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뜩이나 독재자 소리를 듣는 옐친 대통령이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고 새 의회를 종전처럼 해산하려 할 경우 '전제군주'란 비난을 면할 수 없고 그이 정치기반은 약해질 수 있다. 따라서 옐친 대통령으로서는 러시아의 선택당을 중심으로 개혁파 정당들을 결집해 원내 안정 의석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이다.

의회 동의 필요없는 명령권도 가져
 전문가들은, 정국 안정 여부가 새 의회의 생산적 역할 못지 않게 옐친 대통령이 헌법상 권한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도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본다. 새 헌법안은 대통령에게 유례없이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아래 도표 참조). 프랑스 헌법을 모태로 한 러시아 헌법은 대통령 권한에서 가히 세계 최강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권한은 러시아 연방 전역에서 효력을 발생하는 포고령 발동권과 대통령 명령권이다. 이는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며 필요시 국민 투표를 발의할 수 있다. 특히 옐친 대통령운 자기가 제청한 총리를 의회가 세번 이상 인준을 거부할 경우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그러나 의회가 정부 불신임안을 가결하면 대통령은 의회를 1년 내에는 해산할 수 없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옐친 대통령이 남용할 경우 그 부작용은 매우 클 것이다. 물론 의회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헌법을 위반한 경우가 아니라 반역죄나 중대한 범죄를 범했을 때만 가능하다. 탄핵안을 발의할 경우에도 우선 헌법재판소의 동의가 필요하며, 그로부터 3개월 내에 상하 양원 의원 3분의 2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정치 평론가인 애드워드 모티머씨가 옐친 대통령이 총선후 정국을 제대로 이끌지 여부는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권한을 얼마나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음미할 만하다. 충선후 러시아 정국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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