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한 히틀러 슬라이브여 영원하라”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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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선풍 일으킨 지리노프스키는 누구인가



 극우 정당이 약진한 러시아 총선 결과를 전하는 서방 언론은 이를 패닉(대혼란)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대러시아 제국의 재건을 공언하는 극우 자유민주당 지도자 지리노프스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근대 서구 문명의 존립을 위협해온 파시즘의 악몽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 러시아연구센터 소장 티모시 콜턴은 “지금 러시아는 잘못 건드리면 내전이 터질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보드카 헐값’공약으로 가난한 민심 공략
 블라디미르 볼포비치 지리노프스키(47)는 46년 4월25일 카자흐 공화국의 수도 알마아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볼프는 유태인이었지만 지리노프스키는 자기가 러시아인임을 늘 자랑스럽게 강조했으며 극단적 반유태주의를 주장했다. 터키어 영어 독어 불어를 구사하는 그는 70년 모스크바 대학 아시아 · 아프리카연구소를 졸업한 뒤 육군에서 2년간 복무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법률가가 되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말부터이다. 88년 이래 그는 극좌에서 극우까지 모든 종류의 정치 집회를 쫒아다니기 시작했다. 90년 3월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기하자 그는 곧 자유민주당 창당을 선언했다. 창당 선언에서 그는 자유민주당이 유럽과 러시아의 자유주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민주당의 기원을 1905년에 결성된 자유주의 정당인 러시아 입헌민주당(카데츠)에서 찾았다. 처음에는 그를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는 촌뜨기 정도로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91년 대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대통령 선거 때 옐친에 도전한 그는 무려 6백20만표(7.8%)를 득표해 3위를 차지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민주파’로 불리는 계획주의 정치인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고 사람들은 그를 위험한 인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대선 직후 그는 “선거 운동할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옐친만큼의 표는 얻을 수 있었을텐데”라며 여유를 부렸다. 옐친이 의회를 해산했을 때 조용히 엎드려 지내다가, 총선이 공고되고 선거 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다시 대중앞에 나타났다. 그는 특히 텔레비전 연설에 강했다. 그는 개혁파 후보들이 잔뜩 허세를 부리며 현학적인 설교를 늘어놓고 기약 없는 희생을 요구할 때 빠르고 직설적인 연설로 재빨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선 기간에 그는, 러시아를 강하게 만들고, 다른 공화국에 사는 러시아인을 보호하고, 사기업을 지원하여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며, 보드카 가격을 낮추겠다는 지극히 구체적 공약으로 유권자들의 썰렁한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번 총선에서도 그는 비슷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의 선거공약은 애매하지 않고 단순명쾌하다. 예를 들면 ‘1ℓ에 1만8천루블(1만2천원)하는 보드카를 단돈 5루블(3원30전)로 내리겠다’는 식이다. 처음 그가 보드카 값을 내리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이를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간판 공약처럼 되어 있다. 자유민주당 초기 강령을 보면, 그는 산업과 농업의 사유화를 지지하는 등 명백히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외국 물건과 외국의 영향을 배격하면서, 군수 기업의 민영화를 당장 중단하고 다시 무기 수출을 본격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저명한 언론인 콘스탄틴 메드베데프는 그를 국가사회주의자라 불렀다.

 민생고 해결책과 함께 러시아인들을 열광시킨 것은 그의 러시아 제일주의이다. 그의 발언 몇가지를 추려보면 “자유민주당은 소연방 당시의 영토 회복을 지향한다.” “미국은 ‘악의 제국’이다. 미국과 우주에서 대적할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집권하면 독재를 할 것이다. 지금 러시아에는 독재가 필요하다.” “나는 1932년의 히틀러처럼 옛 연방에서 떨어져나간 독립 공화국들을 모두 파괴하고 러시아에 편입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파시스트나 나치라고 하겠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공포보다 좋은 수단은 없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10만명 정도는 없애야 할지도 모른다. 대신 3억명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내가 당선되면 슬라브 민족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러시아에 영토 문제로 시비를 거는 나라에는 핵무기를 발사할 것이다. 알래스카 · 핀란드 · 폴란드 및 차르 시대의 영토도 되찾아야 한다.” “나는 우리 병사들의 인도양의 따뜻한 물에 군화를 씻을 수 있는 날이 와서 소연방을 탈퇴한 공화국들이 다시 러시아에 매달리게 되기를 희구한다. 군복도 여름 옷으로 바꿀 것이다.”등이다.

 파시즘과 다름 없는 그의 주장이 큰 호응을 얻는 가장 큰 원인은 가난이다. 인구의 45%이상이 최저생계 수준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번 선거운동 과정에서 소수의 가진 자와 절대 다수 가난한 자의 구분이 뚜렷해졌다. 서구화를 지향하는 개혁파 정당들은 모두 소수의 가진 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공장 노동자, 농부, 하급 장교, 연금 생활자 그리고 청년층이 그를 지지했다. 이들은 세계 최강대국에서 3류 국가로 전략한 조국 러시아의 현실을 비통해하고 있다. 지리노프스키는 바로 보통 러시아인들의 상처받은 민족주의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을 지향하는 민주파가 러시아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그의 ‘강한 러시아’론은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군대 내부의 ‘지리노프스키 현상’도 심상치 않다. 그의 애국주의적 슬로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군인을 ‘현대의 귀족’이라 부르며 높은 급료와 승진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10월에 옐친의 명령으로 국회의 사당을 공격했던 부대 병사들 가운데 60%가 지리노프스키를 지지했을 정도이다.

서구화 일변도 정책에 대한 반격일 수도
 러시아에는 19세기 중반 이래 서구파의 슬라브파의 사상적 대립이 있어 왔다. 서구파가 서유럽 문명을 모델로 한 사회 개조를 주장한 반면, 슬라브파는 교회와 군주에 대한 사랑으로 옛 시대를 찬미하고 가부장적 공동체를 이상향으로 그렸다. 자유민주당의 득세는 개혁파의 서구화 일변도 정책에 대한 슬라브파의 반격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지리노프스키는 “공산주의자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고 민주주의자는 우리를 거지로 만들었다. 미국은 우리를 착취하고 있고 소수민족들은 도둑질을 일삼는다”라고 주장했다.

 어떤 이는 지리노프스키의 과격한 민족주의를 그의 성장 과정을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은 지난 9월 발간한 자서전 《최후의 南進》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고통받아야 했다. 세상은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선생님의 부당한 체벌과 힘센 아이들 등쌀에 시달리기만 한 외로운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그는 자기를 때렸던 아이들의 이름까지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나는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자랐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나를 따뜻이 대해 주지 않았다. 나는 항상 욕만 먹는 잉여 인간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최우수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던 날 ‘함께 기쁨을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내 방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자축했다. 나는 혼자였다. ’만약 사랑스런 여인이나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면 나는 정치 대신 그에게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여러분은 신문 글귀를 따르지 말고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믿어야 한다. 러시아의 위상 문제에 대해서만 단호할 뿐 알고 보면 나도 부드러운 남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의 논평대로 비록 그를 파시스트로 규정하는 것이 성급한 태도인지는 몰라도 그가 결코 자유주의자나 민주주의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이번 총선은 17년의 제헌의회 선거와 89 · 90 · 91년에 이어 다섯 번째 자유선거이다. 그동안의 선거에서는 항상 민주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서유럽에서도 선거를 하면 극우파가 2~10% 정도 득표하는 것이 통례이다. 만약 러시아 정치가 정상궤도에 올라 있다면 이번 지리노프스키 파문도 일시적 사건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정치 상황은 결코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개혁파의 경제 정책이 파국을 예고하는 상황에서 극우 파시스트의 득세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파멸적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韓宗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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