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 부채질에 ‘통상분규’ 불똥늦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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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가격 과세’ 관련한 기업 차원 마찰 급증할 듯

삼일회계법인의 통상자문 그룹에 속해 있는 張慶俊 상무는 83년 통상전문 회계사로 데뷔했다. 미국의 가전업계가 한국 가전 3사의 컬러 텔레비전에 대해 미국 상무부에 덤핑 제소를 해 한 · 미 간에 최초로 본격적인 통상 마찰이 벌어진 때였다.

 덤핑 제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국내 가전업체들은 미 상무부로부터 장문의 덤핑 관련 조사서가 날아들자 크게 당황했다. 조사서는 주로 판매 · 원가와 관련된 회계 자료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답변 또한 회계 자료로 하게 돼 있었다. 기업 내부 인력으로는 처리하기가 힘든 전문 지식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결국 두 가전업체의 회계감사를 맡고 있던 삼일회계법인 회계사들이 그 일을 맡았다. 장상무와 함께 이 작업에 참여한 회계사들은, 영어에 능통하고 한국뿐 아니라 주요 선진국의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덤핑 제소 절반 이상이 ‘공연한 트집’
 컬레 텔레비전을 둘러싼 한 · 미 간의 통상 마찰 이후 기업 차원의 통상 분규를 담당하는 회계사들이 생겨났다. 국내의 대표적인 회계법인이나 법률사무소에 소속돼 있는 이런 통상 전문 회계사의 수는 수십명에 달한다. 이들의 임무는 주로 골치 아픈 숫자들로 이루어진 회계 자료를 놓고 외국 조사관들과 논리적으로 싸우는 일이다.

 기업 차원의 통상 분규에 관여하는 전문가가 회계사들뿐만은 아니다. 덤핑 여부를 조사하는 각국 정부를 상대로 법률 문제를 처리하고 로비 활동을 하는 변호사들도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통상 전문 변호사가 많지 않다. 제소 당한 업체들이 로비 능력이 뛰어나고 현지 사정에 밝은 현지인 변호사를 고용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자 이들 통상 전문 변호사와 회계사 들은 자기 네 일거리가 줄어들지 늘어날지 몰라 조바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들만의 걱정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정부와 수출 기업들이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야.

 지난해 말까지 한국은 주요 선진국들로부터 1백47건이나 덤핑제소를 담했다. 한국은 덤핑 제소를 가장 많이 당하는 나라의 대열에 끼게 됐다. 그러나 이 제소들 가운데 덤핑 사실이 인정돼 반덤핑 관세를 부과 당하거나 가격 인상을 약속한 것은 43% 정도였다. 나머지 57%는 덤핑 제소를 남용하는 선진국의 경쟁 업체들로부터 억울하게 트집 잡혀 생고생을 한 셈이다. 최근 들어서는 대만이나 멕시코와 같은 개발도상국 기업도 덤핑 제소를 남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자유무역을 기치로 하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은 이런 움직임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어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국의 덤핑 기준과 조사 방법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인 통일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각기 다른 규정을 가지고 있어 남발의 소지가 많았던 점에 비추어 보면 이는 큰 진전일 수도 있다.

 통상 전문 변호사나 회계사 들은 이같은 낙관적인 소식을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동안 겉으로 자유무역이라는 대의명분을 표방하는 나라들이 저질러온 보호주의적 관행에 맞서 싸워왔던 그들은, 자유무역에 관해 좀더 분명한 명문 규정이 생겼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92년 6월부터 미국 철갑업계의 덤핑과 상게관세 제소를 담당해온 삼정법률사무소 曺文鉉 변호사도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로 앞으로 국가 간의 교역이 늘어나면 기업 차원의 통상 분규도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전망한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로 정부 차원의 보호무역주의 수단이 줄어들면, 각국 기업들이 기업 차원에서 그에 상응하는 수단들을 동원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업의 통상 분쟁과 관련한 국제적인 규범이 아무리 잘 정비되더라도 조사기관의 자의성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삼일회계법인 장경준 상무는 “조사기관의 자의성이 전면적으로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해당 기업을 실사하기 위해 한국에 온 조사관들과 회계 자료를 놓고 논리 싸움을 벌였던 경험 때문이다. “시간에 쫓기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들은 방대한 자료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판매 건수 별로, 제품 모델 별로 특정 기간의 모든 관련 비용 명세를 작성해 달라고 한다. 스스로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놓으라는 것이다.” 조사관들은 더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컬러 텔레비전 제조 공장을 실사하기 위해 83년 10월에 방한했던 미국 상무부 조사관 3명은 서류를 집어던지는 거칠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조사기관의 자의성 때문에 85년 앨범에 대한 미국의 덤핑 제소 때 한국 기업들은 큰 해를 입었다. 당시 제소 당한 수출업체 32개는 대개가 수출만 전담하는 기업들이었다. 정상 가격보다 낮게 수출하는 덤핑의 개념적 정의에 엄격하게 따른다면, 이들은 진작에 망했어야 할 회사들이다. 미국의 주장대로라면 이윤을 남기기는커녕 손해를 보면서 수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회사들이 오랫동안 굳건하게 성장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 상무부가 이 회사들에 내린 64.8%의 최종 덤핑 판정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때  미 상무부는 얻을 수 있는 자료 가운데 최선의 자료를 신뢰하면 된다는 자신들의 조사관련 조항(BAI 조항)을 자의적으로 활용했다. 영세한 한국 앨범업계의 재무자료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미국 제소자가 제출한 자료를 덤핑 판정의 근거로 사용했던 것이다.

미 국세청, 한국 기업 현지법인 조사 강화
 국내 통상 전문가들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해 무력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얻어터지면서 ‘국제적인 싸움’의 요령을 터득했다. 그후 반도체나 철강분야에서 미국 업체들이 터무니 없는 덤핑 마진율로 제소했을 때 미 상무부의 예비 판정이나 최종 판정에서 덤핑 마진율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게 됐다. 통상 전문가들은 초기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는 덤핑 제소에 관해서 비교적 잘 대처해 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기업 차원의 통상 분규 가운데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 이후에 갑자기 늘어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 미국의 이전가격 과세 문제다. 제조업자들의 제소에 따라 각국 통상관련 부처가 조사를 벌여 부과하는 반덤핑 조처와 달리, 이전가격 과세는 해당국 국세청이 그 나라에 진출한 외국 법인들을 상대로 세금을 추징하는 절차이다. 이는 많은 기업이 통상 분규를 회피할 방편으로 현지에 직접 회사 또는 공장을 세우게 된 후 생겨난 새로운 싸움 영역이다. 미 클린턴 행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앞으로 4년간 외국계 기업에 대해 4백50억달러의 세금을 추징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에 통상 전문가들은 이전가격 과세 문제의 공론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정부의 논리는 미국 내에서 영업하는 외국계 기업들이 실제로는 상당한 이익을 내고 있으면서도 미국에서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계 현지법인들이 본사에서 들여오는 제품의 값(이전가격)을 조작함으로써 원가를 높여 소득을 줄이거나 없애왔다는 주장이다.

 70년대 중반 미국에 진출한 이래 아직까지 거의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많은 한국 기업의 현지법인들도 악명높은 미 국세청(IRS)의 표적이 되고 있다. 지난 3~4년간 한국기업의 현지법인은 집중적인 조사를 받아왔다. 이 가운데 대우그룹이 현지법인인 대우아메리카는 89년 이미 3천5백만달러에 이르는 추징금을 통보받고 현재 법원에 제소돼 있는 상태다. 가전사 현지법인들의 경우도 집중 조사를 받고 있어 곧 조사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미 국세청이 이전가격 과세의 근거로 삼고 있는 내국세법 482조는 비굑적 객관적이고 일관되게 가격과 소득을 조정할 수 있도록 많은 원칙과 벙법론을 두고 있다. 그러나 미 국세청 심의관들이 해당 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주관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통상 전문가들은 덤핑 제소 초기 단계처럼 이전가격 과세 문제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같은 변호사 선임 등 기업 공조 필요”
 새로운 기업 간의 통상 분규에 대한 대비는 완벽하게 돼 있을까. 이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우군, 즉 한국의 경영자들을 미더워하지 못한다. “한국 기업의 경영자들은 자기의 기업이나 통상 분규에 휩쓸렸을때 ‘재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외국에 물건을 팔 때 외국 바이어와 상담하고 신용장을 개설해야 하듯 거쳐야 하는 필요한 절차로 이해하지 않는다.” 삼일회계법인 장경준 상무의 말이다.

 덤핑 판정 초창기 때 벌어졌던 한국 기업들끼리의 경쟁이 재연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컬러 텔레비전 제조업체들이 덤핑 제소를 당했을 때 통상 전문가들은 각 업체가 같은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각 업체끼리 같은 통계 자료와 논리를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든 업체가 자기회사의 영업 비밀이 흘러나간다는 이유로 반대하며 각각 변호사들을 선임했다. 통상 전문가들은 최종 판정이 날 때까지 사사건건 각 업체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어진간히 속을 끓였다.

 과거 한두 차례씩 덤핑 제소로 혼쭐이 난 국내 기업들은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로 다소 안도하는 기색이다. 반덤핑 조처의 경우 미국은 최종 판정이 난 후 매년 형식적인 연례조사를 벌이며, 유럽공동체는 5년간 조사를 면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 전문가들은 안심하기엔 아직 때가 이르다고 말한다.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간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기업의 통상 분규는 더 많아지고 해결도 어려워질 것이다.” 삼정법률사무소 조문현 변호사의 주장이다.
 金芳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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