樣式史 속에 완성된 美의 본질/미술사학 정립한 《고유섭 전집》/ 구체적 관찰 · 해석으로 정신사 흐름 추출
  • 김훈 부장 ()
  • 승인 1994.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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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훈의 독서산책

한국 미술사학의 개척자인 又玄 高裕燮(1905~1944)의 모든 저작물을 총정리한 《고유섭 전집》전 4권이 얼마전 통문관에서 간행되었다. 이 전집의 제1권은 고유섭이 필생의 열정을 기울여 전국의 불탑을 현지 답사하여 실측 · 촬영한 것을 토대로 한국 불탑의 발생과 정립과 변천 과정을 樣式史의 논리로 분석해낸 《韓國塔波의 硏究》이고, 제2권과 제3권은 그의 미술사론 · 미학이론을 망라한 《韓國美術史 及美學論攷》 및 《韓國美術文化史論叢》이고, 제4권은 미술에 대한 그의 수필과, 계통을 세우기가 어려운 논문을 모은 《高儷靑瓷 · 松都古蹟 · 餞別의 甁》이다.

 이 전집은 방대한 저작물 전체의 분류와 체계화에서 원본 대조 및 引得, 그리고 낱권으로 출간된 각 판본의 서문과 발문 재수록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고도 자상항 에디터십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그 에디터십은 故 고유섭의 金石의 同學인 黃壽永씨 등 후학들과 통문관 주인 李謙魯씨의 것이다.
 이 전집의 발간에 의해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30대에 모든 저작물을 완성하고 광복 직전에 세상을 떠난 한 거대한 선구자의 사유와 관찰과 해석의 체계를 한 점의 손상도 없이 전수받게 되었다.

 빗살무늬토기 이래로 조형적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경영해온 한반도 인간의 역사와 체험 전체를 잘 정돈되고 조화를 갖춘 사유와 해석의 틀 안에서 간직하려는 사람들에게 고유섭의 글들은 더없이 좋은 반려이며 의지처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당대의 역사적 · 사회적 조건의 파생물이며, 그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되고 자리매김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사유의 큰 틀을 세워나가는 고유섭의 글의 하부구조가 허전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렇게 허전해하는 사람들은 미에 대한 사유와 해석이 지상에 존재하는 구체적 사물의 개별성을 떠날 때, 그 사유는 개별적 미의 역동적 가치를 규명할 수 없으며, 결국은 사유 자체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기 십상이다.

 사실 고유섭의 글 가운데에서 한국적 아름다움과 공시적 특성을 언어로써 개념화해 나가는 대목들은, 39세로 세상을 떠난 그의 미완성의 운명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50년이 지난 지금 읽기에다 다소 공허하다. 한국 전통미의 특징적 성격을 비균제성 · 무관심성, 또는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민예적 성격 등으로 규정지은 것이 그의 공허한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그 공허한 대목들이 그의 미의식을 몰역사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독자라면 고유섭의 글이 한국 문화 전체를 개괄하여 개념화하는 과정에서의 공허함을 따라가지 않고, 그가 구체적인 지상의 불탑이나 미술품을 관하고 해석해서 마침내 한 틀의 신뢰할 수 있는 시대 양식의 모델을 그려나가는 과정의, 그 비할 데 없는 풍요함과 과학성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의 풍요함과 과학성은 전집의 제1권인 《한국 탑파의 연구》에서 완연히 드러난다. 그는 여기서 개별성에 대한 검증과 분석의 결과로 樣式의 규명에도 달하는데, 그가 규명한 양식사의 놀라운 점은, 하나의 양식에서 다른 양식이 잉태되고 전환되는 과정에서의 정신사 흐름이 그 양식사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렇게 해서 益山 미륵사지탑과 王宮面석탑이 재래식 목조 탑파의 양식을 재현한 데 불과하다는 관점을 정립했다. 경주의 분황사탑이 톨로 만들었다고 해서 석탑이라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이, 익산 미륵사지탑이나 왕궁면석탑 역시 양식적으로는 순전한 목조탑파에 불과하며, 이같은 시각을 탑의 외적 양식뿐 아니라, 그 조성의 의도와 기법을 분석해서 과학화해 냈다. 즉 그 탑파 안에 돌을 경영하는 인간의 질서와 정돈의 調用이 不在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환언하면, 이것은(이 탑들은) 석탑 양식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내기 위한 창의의 조형이 아니요, 다만 舊來의 양식을 충실히 다른 재료로서 번역(그것도 直譯)한 데 지나지 아니한 순 모방적 의미에 그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양식의 전환에서 찾은 인간 정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륵사지탑이 형식상의 파탄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탑이 구 양식의 말단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며, 왕궁면 석탑은 미륵사지탑보다 양식적으로 조금 진화하여 신양식의 시초에 올라 있으나 그 양식의 理想은 달성하지 못하고 파탄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나무에서 돌로 진화하는 양식의 전환은 그토록 힘겨운 것인데, 고유섭은 부여 정립사지석탑이 양식의 진화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나무를 버리고 돌을 지향하는 전환의 과정에서 인간이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배반하게 되는지를 고유섭의 글들은 분명히 보여준다. 예술의 시대적 유형이란 객관적 양식 그 자체의 과학적 논리적 변화를 파악한 이후에 비로로 정립될 수 있다는 방법론상의 주장을 고유섭의 글들은 내비치고 있다. 아마도 고유섭의 미술 공부는 양식사를 통해 인간 정신의 몇몇 전형을 추출해내고, 그 전형을 통해 다시 원형에 당도하려는 머나먼 여정이었을 터이다.

 황수영 · 秦弘燮 · 崔淳雨 이 3인의 개성 출신들은 한국미술사학계의 제1세대이다. 이들과 이들의 제자들은 한국 미술사학계를 사실상 건설했고 인도해 왔다. 이 3인의 원로학자에게 고유섭은 눈물 없이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없는 스승이자 친구이며 선배였다. 그들은 모두 개성박물관장 시절의 고유섭의 지도와 감화 아래 전공과는 관련 없는 미술 사학에 입문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척박한 시대에 가장 인문주의적인 학문의 터전을 일구었다. 고유섭은 선구자인 동시에 씨 부리는 자였다 광복 직전에 세상을 떠난 그에게 가해지는 ‘식민주의적 미의식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다소 민망하다.

 개성박물관장 시절의 사진 속에서 그는 전시 총동원체제하에서의 군인 복장을 하고 있다. 그는 군복과 각반으로 옥죄인 육신으로 빗살무늬토기 이후의 전과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군복 속에는 그가 생시 한번도 발설하지 못한 不自由가 담겨져 있다.
金 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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