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작품성 안믿는다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2.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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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영화 · · · 유명 작가 · 베스트셀러 위주로 선택



 탐욕스런 독자는 비평가만이 아니다. '충무로'는 비평가 못지않게 게걸스런 소설 독자이다. 새로 나온 소 설을 읽어내는 속도 또한 비평가를 앞지른다. 책읽기의 목적은 물론 서로 판이하다. 문학 비평가가 소설의 작품성곽 문학사적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충무로의 감독 · 기획자 · 제작자는 오로지 흥행성 여부를 독후감의 잣대로 삼는다. 

 문단은 최근 소설의 위기를 이슈로 올려놓고 있다. 본격소설이 독자대중으로부터 멀어 지고 있다는 이 자기 반성은 어떻게 독자들을 다시 끌어모을 것인가를 궁리하는 '생존권' 탐 색이다. 문학비평가 사이에서는 "통속소설에서 대중성의 요건들을 추출. 수용해야 한다"는 과 감한 처방전도 나온다. 물론 안이한 작가정신 과 신세대를 휘어잡는 영상매체의 무제한적 확장이 소설 위기의 근본이겠다.  

 소설과 영화는 친하다. 젊은 소설가들이 만나는 술자리에는 으레 영화 이야기가 나온다. 충무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도 영주 못 지않게 소설이 '주요 안건'으로 거론된다. 문 인은 전문적인 영화관객이며 영화인들은 고급스런 소설독자이다. 

 충무로에서 점은 영화인들에게 "요즘 한국 소설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면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최근 한국 소설에는 논쟁과 시비만 있지 대중성을 확보한 소설은 없다는 것이다.  《소설 동의보감》을 뒤쫓는 '소설… '류의 역사물과 영화와 관련있 는 번역 (추리)소설이 서점을 점령하고 있다. 본격소설은 아사 직전이다.

원작 선택 기준은 "돈 대는 제작자의 눈" 

과연 한국소설에는 비상구가 없는 것일까. 충무로의 전문 독자들은 혹시 대중성의 필요 · 충분조건을 간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충무로에서 건질 만한 것은 없었다. 충무로에서 원작소설을 영화화할 때 그 기준 은 "그 작가가 유명 작가인가, 아니면 그 작 품이 베스트셀러인가" 단 두가지였다. 

 감독 데뷔를 앞둔 김진해씨(《영화의 이해》 번역자)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71년부터 86년까지 2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는 23편, 30만명 이상은 9편이 었다. 30만명 이상을 극장으로 끌어들인 영 화는 <별들의 고향>(74) <영자의 전성시대> (75) <겨울여자>(77) <내가 버린 여자> (78) <미워도 다시 한번 80>(80) <애마부 인>(82) <고래사냥>(84) <깊고 푸른 밤><어우동> (85) 이었다.  

 김씨의 분석에 따르면 흥행에 성공한 이한국영화들은 △ 모두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며 △ 성과 여성을 소재로 하고 있고 △주제가 사회집단의 일반적 관심사가 아닌 개인적이며 △ 대부분 원작소설을 각색했다는 등의 특징을 갖는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에 제작 된, 혹은 제작중인 영화는 소설을 영화한 작품이 예년에 비해 드물다. 갑자기 한국 영화 계에 탁월한 시나리오 작가들이 등장한 것일 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재미있는 소설 이 없기 때문이다. 

 <남부군> (경마장 가는 길) 그리고 최근의 <하얀 전쟁>으로 이어지듯이 90년대의 좋은 한국영화는 원작이 있는 작품들이다. 원작을 영화화하는 전통은 살아 있고 앞으로도 그러 할 것이다. 소설가나 영화감독들은 원작소설 을 스크린으로 옳기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 는다. 좋은 소설이 좋은 영화의 전제 조건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충무로가 베스트셀러나 유명 작가에 눈독을 들이는 능력만 있지 영화의 자생력, 즉 시나리오 작가를 키워낼 생각을 거의 하지 알는다는 데 있다. 

 "원작이 명작일수록 그 영화는 실패하기 쉽다. 반대로 명화는 대개 삼류 대중소설을 영화화한 경우이다. " 젊은 영확평론가 이효인 씨는 이같이 말하고 충무로로 상징되는 한국 영화는 감독 · 기획자의 안목은 거의 배제되고 "돈을 대는 제작자의 눈"이 원작소설 선택의 기준이 된다고 비판했다. 관객을 위해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작자들이 유명작 가 베스트셀러를 고집하는 이유는 이미 광고 가 그만큼 되어 있고,그 독자충이 바로 입장 권을 사는 관객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영화계와 소설계 동병상련  

 충무로의 제작자 · 기획자 감독들이 유명 작가 베스트씰러만을 따르다 보면 악순환 은 멈추지 않는다. 한국영화 발전의 암적 구조인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칼이 기획력 이다. 영화사 '신씨네'가 돋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씨네는 한국 영화계에서 유일하 게 자체 기획력으로 뿌리를 내린 경우에 속 한다. 신씨네의 기획자 신 철씨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비롯 (베를린 리포트) <결혼이야기> 등에서 그 기획력을 인정받았고, 올 하반기에 선보일 <미스터 맘마>에서 제작능력까지 펑가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소설이 아닌 오리지널 시나리오만을 영화로 만들어왔다. 

 "남들처럼 베스트셀러나 신간소설을 많이 읽는다. 그러나 우리(신씨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소설은 없었다"는 신 철씨는 "좋은 원작이 있다면 언제든지 영화화할 것" 이라고 말했다. 문단 ·출판계와 영화의 공 생관계를 강조하는 신씨는 한국영화가 외국 영화 직배 앞에서 휘청거리듯이 한국문단도 곧 외국소설 앞에 무릎을 꿇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품고 있다. 신씨의 관찰에 따르면 영화계와 출판계는 기획력 부재 ·유통구조의 문란 ·서점 (극장) 공간의 부족 · 외국 소설 (수입 영화) 의 무차별 공세 등 동병상련을 겪고 있다.

 장길수 감독은 "70~80년대의 문학은 문 학이 동시대의 공감대를 끌어안았지만 사회 가 급속도로 다원화하는 과정에서 문학이 이 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이 문학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막역한 친구 사이인 소설과 영화는 창작능 력의 저하라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 좋은 소 설과 좋은 시나리오만이 소설과 영화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충무로는 말한다. 출판계 의 발행인과 영화계 제작자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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