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라타의 일기》
  • 파리.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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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5.2. 토 우리집 지하실은 보기 흉하고 컴컴하다. 게다가 퀴퀴한 냄새도 난다. 끔직이도 쥐를 무서워하는 엄마 지하실로 피신할 때마다 쥐에 대한 공포까지도 견뎌야 하니 이중으로 고역이다.…총쏘는 소리가 바로 우리 머리 위에서 요란스럽게 들려 왔다. 문득 나는 이 흉측한 지하실이 우리의 목숨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수단임을 깨달았다. 그러자 보기 싫던 지하실이 훈훈하고 예쁘게까지 생각되었다.

92.5.7. 목 나는 처음에 전쟁이 곧 끝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오늘… 오늘 작은 포탄인지 큰 포탄이진 모르지만 우리집 바로 옆 공원에 떨어졌다. 내가 자주 친구들과 놀러가던 공원인데. 여러 명이 다쳤다. 그 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다. 이야카와 그 애 엄마, 셈마, 니나, 다도, 우리 이웃 사람. 또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을까.…니나, 내 친구 니나는 죽었다. 포탄 파편에 맞아 머리가 부서졌다. 착한 애였는데.

92.5.13. 수 삶은 지속된다. 과거란 잔인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잊어야 한다.
현재 또한 과거만큼 잔인하다. 그런데도 나는 현재를 잊어버릴 수가 없다. 전쟁은 농담이 아니다. 나의 현재, 나의 현실을 지하실.공포.포탄.불길뿐이다.

불길 속에서도 아기들은 태어나고
92.5.30. 토 산부인과 병원이 완전히 타버렸다. 바로 내가 태어난 병원이다.… 다행히 엄마들과 아기들은 구출했다. 불이 나는 순간 두 아이가 막 태어나는 중이었다. 그 애들은 모두 살았다, 이곳 사라예보에서는 자꾸 사람이 죽어간다. 이곳에서는 또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진다. 그런데 그 동안에도 아기들, 미래의 어른들이 세상에 태어나다. 불길 속에서.

92.6.18. 목 오늘도 또 아주 나쁜 소식을 들었다. 크로노티나에 있는 우리 시골집이 불에 타버렸다. 거의 백오십년이나 된 집이었는데.… 집이란 집은 모조리 불에 타버린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왜? 누구 잘못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답하고자 애쓰지만 정답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우리 모두가 점점 불행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정치가 이 모든 불행의 책임자라는 사실도 안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었다. 그렇지만 내 의문에 답을 얻으려면 아무래도 정치가 무엇인지 좀 알아야만 할 것 같다.

92.6.29. 월 날이면 날마다 떨어지는 대포알 소리가 지긋지긋하다! 시체.절망감.배고픔.불행.두령뭄. 이런 것이 다 지긋지긋하다.
바로 이게 나의 삶이다!
열한살 먹은 철 모르는 어린애가 재미있게 살고 싶어한다고 해서 그 애를 나누랄 수는 없다 학교도 없고, 학생들만이 누리는 기쁨도 슬픔도 하나 맛보지 못하는 학생.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고, 친구도 없고, 해도, 새도, 자연도, 과일도, 초콜릿도, 사탕도 없고 겨우 분유나 조금 가진 어린애, 전쟁 통의 어린애. 이제 비로소 나는 내가 전쟁 속에서 살고 있으며, 더럽고 메스꺼운 이 전쟁의 한 증인이 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어린 시절이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들 말한다. 나도 여태까지는 어린이답게 사는 데에 만족했었다. 그런데 이 추악한 전쟁이 나의 어린 시절을 앗아갔다. 도대체 왜 이래야만 할까. 마음이 슬프다. 울고 싶은 심정이다. 눈물이 막 쏟아진다.

전쟁이란 연필은 불행과 죽음만 쓸줄 안다
92.11.19. 목 내가 보기에 정치란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보스니아 회교도를 뜻한다. 이 사람들은 그런데 모두 똑같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서로 닮았다. 다른 점이라고는 없다.… 나는 누가 세르비아 사람인지 누가 크로아티아 사람인지 누가 회교도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치가 여기에 끼여들어  세르비아 사람에게는 S자 회교도에게는 M자, 크로아티아 사람에게는 C자를 썼다. 정치가 이들을 갈라놓으려 한다. 이 같은 글자를 새겨놓기 위해 정치는 최악의 수단, 연필 중 가장 시커먼 연필을 골랐다. 전쟁이라는 연필은 불행과 죽음만 쓸 줄 안다. 왜 정치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까? 왜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할까?…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어리다는 것도 사실이고 정치는 어른들의 일이라는 말도 다 맞는다. 하지만 애가 보기에 우리 꼬마들이 더 정치를 잘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정치가였다면 절대로 전쟁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93.1.26. 화 …미미야, 너도 짐작했겠지만 나는 요즘 전쟁이나 폭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이제는 전쟁이 습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인가 보다. 내가 바라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포탄이 우리집에서 50m밖에 안 떨어진 곳에서는 터지지 말 것, 땔나무, 물, 그리고 물론 전기뿐이다. 이제는 이렇게 사는 데 익숙해졌다. 잘 믿어지지는 않지만 확실히 그렇다. 습관과 생존을 위한 투쟁은 다른 말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93.4.17. 토 이놈의 전쟁은 뭐가 뭐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이 전쟁이 어리석다는 것뿐이다. 모든 것은 다 거기서 비롯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전쟁은 아무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이다.
정치가 돼가는 꼴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정말로 너무나 어리석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살아서 고생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지, 대들보에 밧줄을 매고…. 앞으로도 몇 년을 더 이렇게 살다 보면 나는 스무살이 되고, 그러고도 이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들이 그러듯이 레바논같이 되면… 서른살이 되겠지. 그러는 사이 내 어린 시절은 모두 모두 가버릴 텐데. 내가 죽어도 이 전쟁은 그때까지 안 끝날지 모른다. 엄마가 "츠라타야, 우리도 곧 여기를 떠날 거야"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93.4.19. 월 케카가 편지에 써 보낸 구절이 생각난다. '보고 싶은 츠라타야, 너를 기쁘게 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가져. 그리고 가능한한 예전처럼 여유있게 살도록 노력해봐. 왜냐하면 내일이라도 모든 것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평화뿐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바로 그애들,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는 것이다.

93.5.2. 일 너도 생각나지? 1년전 5월2일. 이 비참한 생활 가우나데서도 가장 최악의 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날이 절대로 가장 견디기 힘든 날이 아니었지만, 정말로 어려운 날들의 시작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최악의 날로 기억하는가 보다. 그날 이후 이제 꼭 1년이 지났다. 이 1년 동안은 하루하루가 5월2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다. 부모님도 건강하게 살아 계신다. 가끔씩 전기, 가스도 들어오고, 아주 조금이지만 먹을 것도 생긴다. 자 그러니 어디 또 해보자. 계속 버텨보자. 하지만 언제까지 버텨야 하나.

가스까지 끊기다니 자살 직전 상태다
93.5.4. 화 또다시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회교도를 나누는 것이 어리석고 끔찍하고 상식에 어긋난다고 내가 아무리 말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머저리 같은 정치가들이 실행하려는 것이 바로 이 나누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기대한다. 밴스.오웬 안도 십중팔구 물거품이 될 것 같다. 제멋대로 지도를 고치고 사람들을 갈라놓으려 하면서 아무에게도 의견을 물어보지 않는다. 정말로 '철부지'들이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게 확실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나누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세르비아 사람이나 크로아티아 사람, 회교도 중 아무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의견을 물러보라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기 편 사람들에게만 의견을 물어볼 뿐이다.

93.5.8. 토 음악 학교엘가다가 시장이 다시선 것을 보았다. 사라예보에 없는 것이라곤 없다. 무엇이든지 다 판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 물건들이 오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시장에서 파는 맛난 것들이라니. 모두들 배가 고프고 먹고 싶은 것 투성이인 판에. 달걀 한 개 값이 5마르크면 누가 살 수 있을까? 초콜릿 하나에 20마르크, 과자 한통에 40마르크, 커피 한 봉지에 1백20마르크,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누가 과연 이런 물건을 살 수있을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물론 아니다.

93.6.1. 화 수도.전기에 이어서 이제는 가스까지 끊기다니 자살 직전 상태이다. 재앙이라고 할까. 미미야, 이제 도저히 못견디겠구나. 전부 다 지긋지긋하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신물이 난다. 욕을 해서 미안하구나, 미미야.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걸 어쩌니. 이제는 제발 좀 그만하면 좋겠다. 멍청이 같은 놈들이 언덕 꼭대기에서나 골목길에서 나를 먼저 쏴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것 같은 생각이 점점 커진다. 이제 갈 데까지 갔다. 마구 고함을 지르고 뭐든지 때려부수고 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그저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안네 프랑크와 같은 최후는 오지 말기를
93.7.10. 토 이제는 네도마저 내 곁에 없다. 네도가 떠나고 나서 나는 내 친구들이 모두 떠났다는 걸 실감했다.… 편지들을 읽어 보았다. 내 친구들에게서 남은 것이라곤 편지뿐이다. 편지를 읽노라면 어느새 내가 그애들 곁에 가 있는 것 같다.…
'보고 싶은 꼬마 계집애 츠라타야. 우리 마당에 핀 꽃 한송이와 숲에서 잡은 나비 한 마리를 너한테 보낸다. 이 나비와 작은 꽃속에 내 마음을 모두 담아 보낸다. 미래의 일일랑 너무 걱정하지마. 용감하고 착한 사람드라에겐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게 마련이라는 점을 잊지마. 너희 아빠, 엄마, 그리고 너 모두 용감하고 착한 사람들이니 앞으로는 기쁨에 가득찬 좋은 날이 올 거야. 너를 매우 사랑하고 네 생각을 자주 하는 케카.'

93.7.23. 금 7월17일 이후로는 줄곧 내 주위에 기자와 사진사들이 맴돈다. 어제는 ABC 뉴스 제작팀이 다녀갔다. '이 주일의 인물'을 찍기 위해서였다. 미미야, 너 들었니? 내가 이젠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 사람들이랑 수다를 많이 떨었다. 물론 영어로, 잘난 체하는건 아니지만 그 사람들이 내 영어가 훌륭하다고 했다. 그러니 오늘 저녁 전세계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나를 바라볼 것이다. 다 네 덕분이다. 미미야. 그런데 나는 촛불이나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내 주위엔 암흑뿐이므로. 나는 암흑만을 바라볼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두 극과 극에서 산다. 우리들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그 사람들은 광명 속에서 산다. 우리는 어둠속에서 사는데.

93.9.5. 일 지카가 오늘 내게 기적 같은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오렌지 하나. 진짜 오렌지! 엄마가 "가만 있자, 내가 아직도 오렌지 까는 법을 기억할까…"라고 말씀하셨다. 물론이지요. 엄마는 오렌지 까는 법을 잊지 않으셨다. 예쁘게 잘 까셨다. 싱싱한 즙이 그득한 오렌지. 냠냠!

93.9.17. 금 …내가 아는 것이라곤 '철부지'들의 장난 때문에 사라예보에서 만 오천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중 삼천 명은 어린아이들이라는 것, 오만 명이 평생 불구자가 되어 지팡이에 의지하거나 바퀴의자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뿐이다. 또 묘지나 공원에는 더 이상 새로운 희생자를 묻어 줄 자리가 없다는 것도 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이 미친 짓이 막을 내려야 할지 모른다.

93.9.29. 수 언젠가는 모든 것이 끝나서 내가 안네 프랑크와 같은 최후를 맞게 되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이 모든 것을 계속 견뎌야만 한다. 미미 너랑 같이. 그러다 보면 나도 다시 평화스럽게 어린 시절을 보내는 어린이가 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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