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위기'와 '인식의 위기'
  • 박순철(편집국장) ()
  • 승인 199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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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황당무계한 향해 계획을 들고 스페인 왕에게 매달렸을 때 한 대신이 이렇게 거들었다고 한다. "위험은 작고 잠재적 소득은 큽니다."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인간을 가정한다면 콜럼버스가 계산한 '기대 피해'는 '기대 수익'을 밑돌았을 것이다. 기대 피해는 예상되는 피해 규모와 발생 확률을 곱한 수치이고, 기대수이가은 예상되는 수익화 그 확률을 곱한 수치이고, 기대 수익은 예상되는 수익과 그 확률을 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콜럼버스가 건 것은 목숨이었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성공했을 때 이익의 10%와 새로 발견하는 영토에 대한 총독 자리였다. 그러나 이 계산의 요체는 확률이었다.

잠재적 소득과 위험에 대한 평가는 모든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결과로 보면 콜럼버스는 그 역사적 항해의 위험도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항해한 지 두달이 넘어 선원들의 선상 반란을 일으킨 순간에 서인도제도의 한 섬을 발견한 것은 한마디로 행운이었다. 한 개인이나 사회가 위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야는 그 미래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평가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에 급격한 변화의 힘이 작용하고 새로운 종류의 위험들이 점점 더 중요해질 때 위험에 대한 평가는 불안정해지기 마련이다.

재해심리학은 위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 축은 위험의 크기에 대한 認和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평가이다. 아무 위험이 없는데 크게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큰 위험이 존재하는데 태평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과대 평가나 과소 평가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두 번째 축은 위험을 제어할 가능성에 대한 인지이다.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라도 적절히 대응하면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천벌쯤으로 알고 아예 체념해 버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위험에 둔감한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
첫 번째 유형(Ⅰ)의 반응은, 위험이 크지는 하지만 적절히 대응하면 위험을 방지하거나 경감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면 과잉 반응을 보이기 쉽고 패닉 현상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두 번째 유형(Ⅱ)은 위험이 적으며 대처 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비용 개념이 중요해진다. 비용이 적게 들면 적절한 대책이 마련되지만 많이 들면 미흡한 상태에서 그치고 만다. 세 번째 유형(Ⅲ)은 , 위험이 크지만 대책 마련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다. 이 경우 체념과 무기력이 지배해 위험을 극복하려는 적극적 반응은 나타나지 않는다. 네 번째 유형(Ⅳ)은 위험이 크지 않으며 제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경우로서, 사람들은 그 위험에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런 분석들은 위험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둔감한 우리 사회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가령 세계 초고의 교통사고율이라는 딱한 사정은, 위험도를 과소 평가해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거나 무관심 속에 묻어버렸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인 것이다.

그 사정은 환경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낙동강 수질 오염으로 세상이 떠들썩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물 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바뀔지는 의심스러운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싯다르타처럼 '물은 생명의 소리, 존재하는 것의 소리, 영원히 생성하는 소리'라는 깨달음이다. 물의 상실이라는 생명의 위험에 대해 무관심한 반응(Ⅳ)은 곤란하다. 또 큰 사건이 벌어져 모처럼 관심이 높아져도 "임기중에 국민들이 수돗물만은 안심하고 마실 수 있도록 하겠다던 6공 대통령의 실없는 약속과 페놀사건 이후 거창한 종합 대책의 입맛 쓴 종말을 지켜본 국민으로서 무기력한 반응(Ⅲ)을 벗어나기도 어렵다. 그래서 평소의 무관심이 위기 때의 무기력으로 잠깐 바뀌었다가 다시 무관심의 심연으로 주저 앉는 '無策의 악순환'을 맴돈다.

공해 문제는 본질적으로 '공적인'문제이다. 따라서 공공 부문을 관장한 정부의 책임이 원초적 설정이다. 그러나 정부고 물 문제를 과소 평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눈치보기 반응(Ⅱ)으로 일관한다. 경제가 좀 나쁘다 하면 물에 대한 투자나 규제쯤은 쉽게 뒤로 물러선다. 경부간을 두 시간에 달리기 위한 10조7천억원 투자에는 선뜻 나서도, 맑은 물 종합대책을 위한 15조원은 천문학적 숫자라면서 미적거린다. 그래도 사건이 발생하면 번개같이 대책을 나열하는 과일 반응(Ⅰ)을 보이다가도 관심이 식으면 한달이 못돼 비용.효과 계산에 바빠진다.

이런 인지.반응의 틀 속에서는 날이 갈수록 수질오염이 악화할 수 밖에 없다. 물은 생명의 문제이고 해결 가능한 문제라는 상식의 재확인이 새삼 요구된다. 국민과 정부의 인식을 제Ⅰ象限으로 옮겨  그곳에 붙들어 놓아야 한다. 과잉 반응이 무관심 보다는 훨씬 건강하다. 이렇게 물 위기의 본질을 뜯어보면 '인식의 위기'라는 우리 사회의 전환기적인 위기 구조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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