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꽃’ 못보고 간 ‘늦봄’ 문익환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4.02.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찰력 뛰어나…“앞에 놓인 바위를 뚫고 뒤에 있는 꽃을 봐야 한다”



 서울 도봉구 한국신학대학에 차려진 고 文益煥 목사 빈소에 국내외 조문객의 발길이 R끊이지 않던 1월31일, 둘째 아들 성근씨는 오후 내내 도봉구 수유리 한일병원 영안실에서 부친의 시신을 돌보고 있었다. 문목사의 얼굴을 석고로 떠내는 작업을 거들고 지켜보면서, 그는 가끔씩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약 4시간에 걸친 작업이 끝나자 문목사의 얼굴은 하얀 석고로 되살아났다. 조심스럽게 받드는 아들의 손에서 문목사는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예전의 얼굴을 온전하게 되찾지는 못했다. 눈두덩이 내려앉은 것이다. 장기 기증을 원하는 고인의 뜻에 따라 두 눈을 적출한 탓이다. 젊은이 못지 않게 건강했던 문목사의 두 눈은 이제 한 젊은이와 한 어린 아이의 몸을 빌려 생전에 못이룬 통일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그건 너무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성근씨는 “누군가 아버님의 건강을 살펴드렸어야 했는데, 출옥 후 그 몰상식한 일정에서도 워낙 당당하게 처신하셔서 가족이나 주변 분들이 모두 선친에게 ‘세뇌’당했다. 한겨울 야외 집회에 초청 받으면 두세 시간씩 단상에 꼿꼿이 앉아 계시고, 스무명 규모의 지방 청년회 모임까지 마다 않고 달려가시는 그분의 열성에 우리가 모두 속은 것이다”라고 탄식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문목사 자신도 그렇게 빨리 죽음이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최근 문목사는 암과 사투하는 金南柱 시인을 매일같이 찾아가 간병하며 기를 불어넣는 일에 열심이었으며,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인 사단법인 ‘통일맞이’를 조직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문목사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남주 시인은 병상에서 가슴을 치며 슬퍼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목사는 이렇듯 이 세상 모든 모순과 분단과 불평등에 개입하면서 정작 자신을 돌아보거나 정리하지는 못했다. 시인이고 신학자이며 통일운동가로서, 비록 그는 생전에 옥중서한집 세 권과 시집 다섯 권과 성서 번역을 비롯하여 숱한 책을 썼지만 가장 중요한 자서전은 남기지 못한 것이다.

 자서전을 쓰기는 썼었다. 문목사가 마지막으로 감옥(안동교도소)에 갇혔을 때 가족들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제발 이번 기회에 자서전을 써라. 그냥 나오면 다시는 삶을 정리할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간청했다 한다. 가파른 한국 현대사 구비마다 문목사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그래서 문목사 머리 속에만 들어 있는, 숱한 인물과의 교제를 통해 확인되는 현대사의 뒷이야기들을 밝혀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러한 가족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문목사는 거기서 ‘편지 40편 분양의 자서전 초고’를 써내렸다. 그러나 출감할 때 이 귀중한 역사 자료는 반출이 금지됐다. 가족들은 “아마 87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양김 통합을 추진하면서 겪은 내용을 썼기 때문에 교도소에서 압수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6공화국 때 벌어진 일이다.

 이 자서전 초고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만약 진작 빛을 봤다면, 그것은 아마 문씨 가문이 겪은 역정을 세세히 담아냈을 것이다. 늦봄 문익환. 그와 그의 조상과 그의 후손이 엮어왔고 엮어가는 삶이 꼭 그랬다.

 미약하나마 문목사 선대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문목사가 부친인 文在麟 목사와 모친인 金信? 여사와의 대담을 글로 엮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間島 이야기’를 보면, 한말과 일제시대 민족 수난사가 잘 드러나 있다. 이 대담에서 특히 김신묵 여사는 대단한 기억력을 보여준다. 1899년 2월 18일 문목사 조부 집안을 비롯한 네 가문은 두만강을 하루 만에 건너 북만주 명동으로 이주했다. 당시 네 가문을 이끈 어른들은 모두 당대의 巨儒로서 대개 동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실천적 실학자였다. 시인 윤동주의 가문은 이듬해인 1900년 명동으로 들어왔는데, 김신묵 여사 집안과는 사돈간이었다. 이들 다섯 집안을 명동의 5대 가문이라고 한다. 명동은 좁은 지역이었지만 북간도 민족 정신의 온상이요 민족 운동의 발화점이 된 중요한 곳이다.

윤동주에 대한 정신적 부담 갚았다.
 소년 문익환과 윤동주는 명동에서 서로 이웃에 살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명동소학교와 용정의 광명중학교를 함께 다녔다. 특히 두 소년은 광명중학교 졸업반 시절 문목사의 외할아버지인 金河奎 선생으로부터 《논어》와 《맹자》를 함께 배우기도 했다. 사실 젊어서 옥사한 저항 시인 윤동주에 대한 그리움은 문목사로 하여금 시인으로 거듭나는 데 지렛대 구실을 했고, 문목사가 생전에 스스로 밝혔듯이 “어느 정도는 윤동주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목사는 민족 시인이자 친구인 윤동주에 대한 정신적 부담감을 몇 갑절 갚고도 남는 발자취를 남겼다. 미국 피린스터 신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신학자의 길을 걷던 문목사가 그 멀고도 험한 민주화투쟁의 길로 들어선 것은, 75년 8월 오랜 친구이자 정치인인 張俊河 선생이 의문사하고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75년 8월 무렵이다. 이듬해까지 성서 번역을 끝내기 위해 마음을 다잡던 문목사에게 장준하 선생 사건은 어떤 계시로 다가왔다. 그 뒤 문목사는 스스로를 ‘장준하의 대타자’라고 묘사했다.

 기어코 그는 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유신 독재의 폭압을 정면에서 맞받아친 ‘3·1민주구국선언’성명서를 초안하고 발표한다. 이는 꺼져가는 민주화 운동에 새 불을 지피는 사건이었으며, 이후 문목사를 여섯 차례에 걸친 투옥과 끊임없는 투쟁의 길로 나서게 한 사건이었다. 뒤늦게 재야운동에 뛰어들었대서 호를 ‘늦봄’이라고 지은 문목사는 분명 민주화 운동에서 지각생이었지만 곧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재야의 정신적 지도자로 우뚝 섰다.

 통일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열정을 억누르지 못한 문목사는, 89년 3월25일 마침내 방북을 결행한다. 남쪽 재야 지도자로서는 처음인 김일성과의 만남. 이어서 공안 정국이 불어닥치고 ‘분단의 벽을 허문 쾌거’라는 찬사와 ‘낭만적 통일지상주의’라는 비난이 문목사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90년 10월말, 문목사는 〈한겨레 신문〉에 실린 최일남씨와의 인터뷰에서 “시인이란 앞에 놓인 바위를 뚫고 뒤에 있는 꽃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는 현실 정치를 뛰어넘은 통찰력을 말하고 역사를 꿰뚫는 혜안을 말합니다. 시인은 결코 환상주의자가 아니라 상상력과 투시력을 겸비해 현실의 벽을 깨는 사람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통일을 열망하는 시인의 방북
 이처럼 그는 재야의 지도자라기보다는 통일을 열망하는 시인으로서 북한 방문을 결행한 것이다. 시인이 뚫어놓은 방북의 길을 따라 소설가 황석영씨와 전대협 대표 임수경양이 북한을 다녀왔다. 윤동주를 능가하는 시심으로, 장준하를 뛰어넘는 민주화에 대한 열정으로 바쁘게 이 사회의 구석구석을 누비던 문목사는 숱한 사실을 글로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문목사는 민주화 과정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수많은 선후배가 지켜보는 가운데 1월 22일 경기도 남양주군 마석 모란공원에 묻혔다. 비록 정부가 북측 조문단의 입국을 거절하긴 했지만, 북측은 1월 20일 유족들에게 팩시밀리 한 통을 보냈다.

  ‘문익환 목사의 유가족들에게.
 나는 문익환 목사가 뜻하지 않은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에 접하여 유가족   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남조선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나라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온 명망있는 통일 애국 인사 문익환 목사를 읽은 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큰 손실로 됩니다.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념원하여온 조국 통일의 날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별세하였지만 그가 통일 애국의 길에 남긴 업적은 해내외 동포들의 마음 속에 언제나 간직되어 있을 것입니다.
 김일성.
 1994년 1월 19일‘

 문목사는 이제 가고 없지만, 그의 맑은 두 눈과 거대한 정신은 이 세상에 남아 생전에 그를 흠모했던 자와 그를 비난했던 자를 모두 그의 영전 앞으로 끌어모았다. 이 또한 문목사의 업적이지 결코 업보는 아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