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시장 경제 시대는 끝났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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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 대통령의 급진 ‘개혁 열차‘에 급제동



 지난 2년 동안 시장 경제라는 종착역을 향해 고속으로 치닫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개혁 열차에 급제동이 걸렸다. 옐친 대통령은 지난 20일 단행한 개각을 통해 당면한 경제 난국을 타개할 경제팀의 핵심 인물 대부분을 보수파 인사로 기용했다. 이에 대해서눈, 옐친이 올 봄에 예상되는 정치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일단 전술적 후퇴를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옐친이 이제서야 급진 개혁의 부작용을 깨닫고 뒤늦게 궤도 수정을 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 경제는 월평균 인플레가 무려 15~18%씩이나 되고 루블의 화폐 가치도 달러당 1천 6백루블 수준을 맴도는 등 파산 직전 상황이다.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는 이처럼 엉망진창인 경제를 ‘낭만적 시장 경제(market romanticism)'라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그는 지난 20일 새 내각의 경제 정책을 집행할 부총리 4명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제 러시아에서 낭만적 시장 경제 시대는 끝났다”라고 천명했다. 그의 발언은 앞으로 경제 개혁 속도가 크게 늦춰질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부총리 4명 가운데 공업부문을 담당한 올레그 소스코베츠(44), 사회보장정책을 담당한 유리 야로프(51), 농업 담당인 알렉산드르 자베류하(53)는 모두가 점진적 경제 개혁을 주장하는 보수파 인사다. 사유화 담당 부총리인 아나톨리 추바이스(38)만이 급진 경제 주창자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도 급진 경제론자인 예고르 가이다르 부총리와 보리스 표도로프 재무장관과 호흡을 같이하며 급진적으로 경제 개혁을 추진해왔다. 옐친이 보수파인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천거를 그대로 수용해 부총리 3명을 보수파에서 기용한 것은 당면한 경제난을 급진적인 경제 정책만으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경제팀 핵심 인물 대부분 보수파로 기용
 전문가들은 경제 팀이 보수파 위주로 짜여짐에 따라 경제 운용이 지금까지보다 신중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급진 경제 개혁론자인 가이다르 전 부총리나 표도로프 전 재무장관이 추진했던 급진적 자본주의화 정책이 크게 후퇴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인선 결과가 러시아에서 서유럽식 시장 경제 모델이 통하지 않음을 반증한 것이라고 꼬집는다. 지난 2년간 추진해온 충격 요법이 오히려 경제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지적이다.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기자 회견에서 새 경제팀의 최우선 과제가 살인적인 인플레를 억제하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월평균 15~18%인 인플레를 연말까지 8~9%로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 수치는 지난해 정부가 공약한 5% 목표를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어서 벌써부터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정부에 4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국제통화기금(IMF)은 높은 인플레를 이유로 차관 제공을 꺼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경제팀이 앞으로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통화량을 늘리고, 부실 기업을 살리려고 은행 대출을 무리하게 늘릴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철저한 서유럽식 시장 경제 신봉자인 표도로프 재무장관의 탈락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그는 중앙 은행 총재인 빅토르 게라시첸코가 유임되자 “단순히 돈이나 찍어내는 사람과 일할 수 없다”라며 사직했다. 92년에 취임한 게라시첸코는 통화량을 무한정 늘려 초고속 인플레를 유발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취임한 뒤 인플레가 월평균 20%에 달했고 루블화의 가치는 달러당 1백50루블에서 1천5백53루블로 급락했다. 그가 권좌에 남아 있는 한 러시아 정부의 재정 적자나 살인적 인플레를 잡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표도로프의 주장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체르노미르딘 경제팀이 앞으로도 옐친 대통령이 추구해온 개혁 정책은 계속 추진할 것으로 내다본다. 다만 그 속도가 대폭 조정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일부에서는 새 경제팀의 궤도 수정이 오히려 경제 혼란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고 본다. 표도로프 전 재무장관은 현재 달러당 1천5백50루블 수준인 화폐 가치가 연말에는 1만2천루블까지 폭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또 인플레는 당분간 수그러들다가 4월부터 다시 치솟기 시작해 국민들의 저축 의욕을 떨어뜨릴 것으로 본다. 저축이 없으면 투자도 없으며, 투자가 없으면 생산도 없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국민 소득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이 표도로프의 주장이다. 새 경제팀의 궤도 수정이 개혁 열차를 목적지까지 제대로 인도할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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