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총리, 여론 꿰뚫고 ‘김빼기’ 성공
  • 베를린.김진웅 통신원 ()
  • 승인 1994.02.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독 출신 대선 후보 ‘각본대로’ 중도 하차…측근 헤어초그 내세워


 독일에서 94년은 ‘대선거의 해’로 불린다. 그 첫 번째가 5월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이다. 지금 독일 각 정당은 대통령 후보를 최종 결정하고 당선 전략을 짜는 데 몰두하고 있다. 물망에 오른 후보는 집권 여당인 기민·기사당의 로만 헤어초그, 거대 야당인 사민당의 요하네스 라우와 여성 후보 힐데가르트 함-브뤼허, 그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엔스 라이히 등 4명이다.

 가장 유리한 후보는 여당의 추대를 받는 연방헌법재판소장 헤어초그(59)이다. 31세에 대학 교수를 지낸 그는 법조인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 받아 83년 콜정권이 들어선 이후 헌법재판소 부소장을 거쳐 소장으로 재직해 왔다. 그는 70년 기민당에 입장한 이후 정치권에서 20년 이상 콜 총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콜의 사람’으로 분류된다. 일부에서는 그의 극우보수적 성향을 비난하며 대통령감으로 부적합하다는 비판도 한다. 여당 외에 극우 정당에서도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을 보면 그의 성향을 알 만하다.

 헤어초그가 막바지 단계에서야 여당 대통령 후보로 등장한 이면에는 콜 총리의 치밀한 정치술이 숨겨져 있다. 원래 콜 총리가 추천한 후보는 무명의 동독 출신 스테펜 하이트만이었다. 콜은 동서독 화합을 위해 동독 출신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하이트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끝없는 자질 시비 끝에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애초부터 동독 출신이라는 점만 빼면 도대체 대통령감이 안된다는 평을 받아온 하이트만을 후보로 올린 콜의 연극은 훌륭한 것이었다. 콜은 순진한 목사 출신인 하이트만을 내세워 동독 출신 후보를 선호하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김 빼기 작전을 멋지게 해치운 것이다. 마음에 두고 있던 헤어초그를 일찍 공개해봐야 언론의 표적만 될 뿐 이득이 없다는 계산도 들어맞았다.

사민당, ‘라우 대통령 - 샤르핑 총리’ 꿈꿔
 헤어초그의 맞수는 사민당의 라우(62)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사민당의 아성인 노르트라인 - 베스트팔렌 주에서 85년 이래 주 수반자리를 지키고 있다. 총리 후보로도 출마했던 그는 현재 사민당 대표 샤르핑을 비롯한 당수뇌부의 존경을 받으며 당내에세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한다. 타고난 중재자·화해자로서의 원만한 성격은 자타가 인정하며, 자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라우는 전 총리이자 당 원로인 헬무트 슈미트로부터 일찍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권유 받았었고, 이번에도 당의 전폭적 지지를 얻어 후보로 추대됐다. 그는 후보들 가운데 국민의 신임과 존경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사민당의 궁극적 목표는 라우를 대통령으로 내세운 뒤 연말에 실시할 총선에서 샤르핑을 총리로 당선시켜 60~70년대의 화려했던 사민당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이다.

 한편 연합 여당 내에서 자민당은 기민·기사당 후보 헤어초그를 지지하지 않고 독자후보를 내놓았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함-브뤼허(72)후보는 당내 원로인 겐셔 전 외무장관이 연합 여당 후보로 채택되지 못하자 후보로 추대됐다. 여론의 평가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는 82년 당시 콜 정부가 연정을 제의하자 당의 진로를 생각하기보다는 개인적 명예에 집착하여 처신했다고 한다.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그가 후보로 나선 이유는 자민당의 위상과 연관해 후보로 나선 이유는 자민당의 위상과 연관해 이해할 수 있다. 연합 여당 안에서 자민당은 최근 들어 콜 정부와 사사건건 정책 차이를 보였다. 독자 노선을 추구하다가 아예 결별한 조짐도 있다. 자민당 대표인 깅켈 외무장관은 “이제 연정은 끝났다”라고 밝혀 사태가 심각함을 보여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민당은 여당의 공동후보 추대 요구를 거부하고 함-브뤼허를 등장시킨 것이다. 그가 끝까지 경선에 나설지 아니면 최종 순간에 다른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지는 자민당의 저울질에 달려있다.

헤어초그 대 라우 2파전으로 압축
 이 세 후보 외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엔스 라이히는 동독 출신으로 통일 당시 동독 시민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진보적 시민단체들의 추대를 받으며 역시 진보정당인 동맹90 및 녹색당의 지지표를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선 가능성은 얼마 없지만 라이히는 연정으로 부패한 기성 정치에 자극을 주고 정당 정치 본연의 기능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출마한다고 밝혔다. 그는 시사 주간지 《디 자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정당을 없애거나 대항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당간 권력 균형을 이루어 정당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하자는 겁니다.”라고 출마의 변을 밝혔다.

 오는 5월23일 연방의회에서는 이 네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연방의회는 국회의원 6백62명과 정당 의석 수에 비례하여 각 주의회에서 파견된 6백62명 등 총 1천3백2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2차 투표에서 과반수 이상 득표자가 없는 경우 3차 투표에서 다수 득표자가 5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오르게 된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일단 의석 분포로 볼 때 헤어초그와 라우의 대결로 압축된다.

 84년 이래 10년간 대통령을 맡아온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전체 독일 국민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그는 아직도 깊은 골이 팬 동서독 간의 진정한 화합을 위해 동독 출신이 자기 후임자로 선정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곧 실시될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희망이 반영되기는 힘들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