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개혁·개방 10년전 시작”
  • 한종호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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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근 대중 교류로 본격화…“주체적 개방은 완충기 체제 전략”



 북한 조선노동당 서기 겸 최고인민위원회 외교위원장 黃長樺의 중국 방문(1월15일~20일)은 여러 가지 이유로 국제적 관심사가 됐다. 그가 92년 8월 한·중 수교 이래 북한 고위 인사로는 처음 중국을 방문한 것인 데다, 북경에서 김일성 방중 문제를 협의한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또 개방파 실력자인 金正字 대외경제무역위원회 부위원장이 이 달에 북경을 방문하여 두만강 경제특구 문제를 협의할 것이라는 소식도 뒤를 이었다. 핵문제 타결 가능성이 높아진 시점인지라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 아니냐 하는 추측이 무성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80년대 초부터 중국을 모델로 꾸준히 경제 개혁을 추진해 왔다고 한다. 최근의 움직임은 북한과 중국의 경제·군사 협력 관계가 깊어지면서 북한의 경제 정책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82년 중국 ‘자주 외교’ 선포 뒤부터”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일반적인 원조로 유지되어 왔다. 양국 공동으로 76년 1월 중공하여 송유를 개시한 ‘중·조 우의 송유관로’는 당시 양국의 협력 관계를 대표하는 사례이다. 그러나 10년 간의 문화대혁명으로 만신창이가 된 중국은 78년 12월 11기 3中全會를  열어 이른바 ‘4대 현대화 정책’을 내걸고 개혁·roqd wdcor을 본격 추진하기 사작했다. 북한에 대한 원조도 줄였다. 북한은 게다가 중국이 79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맺는 등 협력 정책을 편 것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북한과 중국은 냉각기를 맞았고, 북한은 80년 6차 당대회에서 ‘인민 경제의 주체화’를 내세우며 개방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민족통일연구원 許文寧 박사는 “북한이 중국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은 82년 중국이 ‘독립 자주 외교’를 선포한 뒤부터이다”라고 말했다. 맨 먼저 82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고 이듬해에는 김정일이 심천 경제특구를 시찰했다. 84년에는 중국의 중외합자경영기업법을 본떠 합영법을 제정했다.

 합영법을 제정하기 전에 북한에 들어간 외국 자본과 기술은 중국·소련의 원조가 아니면 조총련이 기부한 ‘애국 공장’이 대부분이었다. 67년 애국목재공장을 효시로 계속된 애국 공장 건립은 기와 및 봉재 공장(72년) 건설기기공장(75년) 인스턴트 라면공장(77년) 물엿공장(78년) 맥주공자(80년) 등이 있다. 최근에는 92년에 애국 컬러 텔레비전 조립 공장이 기증됐다. 그러나 이 애국 공장은 북한측의 운영 능력이 부족해 북한 경제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외자 도입은 84년 9월8일 제정한 합영법을 공포한 뒤부터 이루어졌다. 87년 3~4월 모스크바에서는 조선국제합영총회사 주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공업제품 전시회’가 개최됐다. 여기에는 합영으로 생산한 상품 2천여 점이 출품됐다. 91년 4월13일 평양 문수동에 있는 청년극장에서는 조총련과의 합영제품 전시회가 열렸다.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참석한 가운데 제품 설명이 끝난 뒤 북한 최초의 패션쇼가 열려 13명의 배우가 4개 합영회사가 생산한 봄옷 29점을 선보여 화제가 되었다. 관람객이 넘쳐 전시회를 나흘이나 연장해야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개혁하는 데는 소련·동유럽형과 중국형 두가지 모델이 있다. 중국 동북재경대학 金鳳德 교수는 “중국식 개혁의 특징은 첫째, 경제 개혁을 우선하여 시기와 조건이 성숙된 뒤 점차 사회 개혁으로 감으로써 진동을 최대한 감소시킨다. 둘째, 공산당 지도 아래 사회주의 제도를 견지한다. 셋째, 출발점을 잘 꾸려나가고 출발이 성공하면서 전면 확대한다는 것이다”라고 한 한술대회에서 말했다. 김교수는 불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움직임으로 다음의 네가지를 꼽았다.

 첫째, 북한은 최근 몇년간 소유제도를 꾸준히 완화했다. 즉 사회주의적 공유제도를 굳게 지킨다는 전제 아래 비사회주의적 경제의 존재와 발전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둘째,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를 수정했다. 북한의 대표적 경제운영 방식은 60년대에 나온 ‘대안의 사업체계’이다. 이는 중앙집권적 경제체제를 공업 분야 기업 운영에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85년부터 대안의 사업체계에 대한 조정이 시작됐다. 일정한 경영자율권을 가진 연합기업소가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생산계획과 일상적 경영, 자금조달 및 원자재 구매, 외화의 사용과 관리, 노동력 이용 등에서 어느 정도 자율권이 행사되고 독립채산제가 실시됐다. 이는 중국이 진행해온 국영기업 경영 개혁과 유사한 것이다.

 셋째, 기업에 대한 중앙의 직접관리 기능을 약화시켰다. 기업의 경영 방식이 달라짐에 따라 중앙 부처에 집중되어 있던 많은 권한이 각 지방과 기업으로 분산되고 있다. 넷째는 대외개방 확대이다. 이미 84년에 합영법을 만든 바 있는 북한은 91년 12월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선포하고 각종 투자 관련 법률을 만들었다. 특히 외국인 투자 유치 분야에서 북한은 중국보다 더 유리한 우대정책을 내놓고 있다. 김교수는 “북한의 개방 속도는 개혁 속도보다 빨라질 수 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과감히 추진한다면 ‘극동의 새로운 별’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북한이 91년 12월28일 발표한 나진·선봉 경제특구 설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북한은 합영법을 제정하기 앞서 실무자들을 중국으로 보내 현지 조사를 시켰다. 그런데 이 때 중국 경제특구에서는 대대적인 반사상오염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조사단은 ‘경제특구를 설치하여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 사상오염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에 따라 84년 합영법을 제정할 때만 해도 북한은 “우리 실정에 경제특구는 적합하지 않다”고 했었다. 특구를 설치할 경우 예상되는 사상오염을 우려해서이다. 그러던 북한 지도부가 91년 경제특구 설치를 선포하고 한국 기업인들에게까지 손짓을 하게 된 것은 상당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군부와 전문관료 연합세력이 개혁 주도
 이같이 정책을 수정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다. 오랫동안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영향을 미쳐온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캘리포니아 대학)는 “북한 내부에서는 긴급한 경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그룹과, 개혁의 결과를 걱정하는 그룹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아직은 미니멀리스트(개혁반대파)에게도 힘이 있지만 결론은 대체로 개혁파가 승리하는 쪽으로 나고 있다. 최근 북한의 정부 요직에 임명된 인물들의 주의깊게 보면 군부와 전문직 고급관료 세력의 연합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와 한국에서는 바로 이런 연합 세력이 경제 개혁을 주도했었다”라고 말했다.

 민족통일연구원의 허박사는 “북한의 개방 정책은 김정일 후계 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개혁·개방을 통한 인민 경제 수준의 향상이야말로 김정일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살아남기’(90~93)에서 완충기(94~96)를 거쳐 ‘잘살기’(97년 이후)를 추구할 것이며, 완충기의 체제 전략이 ‘주체적 대외개방’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이 제한적이나마 경제 개혁 및 개방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이 항상 언론 매체에 크게 소개되는 이유는, 북한이 어떠한 변화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새로운 경제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이 작년 12월22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단·중기 중국 전략은 중국식 경제 개방 모델을 따르면서, 중국의 도움으로 서방 제국으로부터 선진 과학기술 등의 경제 협력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북한은 러시아 중국 동유럽 베트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개방 경험을 흡수하여 나름대로 특색 있는 사회주의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개혁 후발국의 비교우위’라고 부른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최근 〈일본 경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지금 문제는 과연 북한이 정치·경제 체제를 변화시킬 것인가 여부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변화를 모색할 것인가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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