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노동운동가의 ‘이유 있는 반항’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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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봉투’ 폭로한 김말룡 의원 “불법 행위 고발에 여야 합의 필요한가”

민주당 김말룡 의원(전국구)은 올해 67세이다. 민주당에서 홍영기 의원(75) 다음으로 나이가 많지만 초선이기 때문에 당내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런 그가 요즘 정가를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다. 한국자동차보험(자보)측에서 자기한테 거액의 돈봉투를 건네 주려고 했다는 사실을 폭로해 정가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김의원의 폭로로 금품 수수 의심을 받게된 같은 노동위 소속 의원들은 내심, 혹은 노골적으로 그가 언행을 자제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노동위 위원장을 같은 민주당의 장석화 의원이 맡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 지도부는 집안 싸움으로 비칠 것 같아 자중해 달라고 압력을 넣고 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현재 국회 윤리특위는 과연 자보측이 노동위 의원들에게 금품을 건넸는가에 조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가 이 사건을 폭로함으로써 전하려는 메시지는 그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노총 창립 대의원을 지냈으며 원내에 들어오기 전 40여년 동안 재야에서 노동운동에 전념해온 그는 “국회노동위에서 짧은 기간 활동하면서 노동과 관련한 모든 제도권 기구가 구조적으로 부패했음을 실감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국회가 부패를 앞장서 척결해야 하는데도 부패를 방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으며, 그런 불만이 누적되던 중에 우연히 발설하게 된 것이 돈봉투 사건이다”라고 얘기했다. 그가 돈봉투 사건을 터뜨림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총체적 진실을 이해하려면, 이 사건이 불거져나오고 확대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때 국회 노동위는 상습적으로 노사분규가 일어나는 여섯 기업의 사용자를 증인으로 채택해 조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포항제철 회장과 사장은 아예 출석하지도 않았으며, 자보의 김덕기 사장과 범한정기의 정순호 사장은 야당 의원들이 조사한 사실과 엇갈리게 증언했다. 국감이 끝난 뒤 민주당의 노동위 의원들은 포철 관계자는 불출석으로, 자보의 김사장과 범한정기의 정사장은 위증 혐의로 각각 고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민자당측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위원장인 장석화 의원과 민자당 간사인 최상용 의원, 민주당 간사인 원혜영 의원이 의견을 절충해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양당 간사는 해를 넘기도록 의견을 접히지 못했다.

 증인 불출석과 위증에 관한 고발건이 처리되지 않자 김말룡 의원은 장석화 의원에게 위원장 직권으로 고발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장의원은 여야 간사가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원장 명의로 고발하는 것은 국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거절했다.

 김의원과 장위원장은 팽팽히 맞서다 당의결정에 따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1월7일 민주당 확대간부회의에서는 위원장 명의로 고발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으나 17일 열린 최고회의에서는 당 노동특위 위원장인 김말룡 의원 명의로 고발하자는 쪽으로 뒤집어졌다. 김의원은 국회 차원에서 조사가 진행된 일을 당 특위가 고발한다는 것은 아무의미가 없다고 맞서며 재고를 요구했으나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당무회의가 뚜렷한 이유 없이 두 차례나 연기됐다. 그러던 중 돈봉투 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의원은 왜 무리한 요구를 했나
 이같은 과정을 들여다보면 국회 노동위 위원장 직권으로 고발해야 한다는 김의원의 주장은 상식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야당에서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하더라도 여야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원장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의원이 어째서 그같이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의원은 석달여 증인 불출석과 위증에 관한 고발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참기 어려운 분노를 느꼈다”고 말한다. 위증건은 둘째치고라도 명백한 불법 행위인 증인 불출석에 대한 고발마저 여야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여야가 협상을 벌이는 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덮어버리는 요식행위로 비쳤다고 한다. 그가 장위원장에게 위원장 직권으로 고발하라고 요구했던 것은 장위원장이 고발하라고 요구했던 것은 장위원장이 고발 건에 대해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소극적이었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실제로 장위원장은 ‘여야 합의가 없었다’는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고발 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최소한 고발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책임이 여당인 민자당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하고 일을 매듭지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김의원은 일의 진행이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서 새삼 돈봉투 건을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또 대구·경북 지방 노동청에 대한 국정감사 때 포철 관계자들이 회장과 사장을 증인으로 출석시키지 않으려고 맹렬히 로비를 펼쳤던 사실도 고발 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그는 “당시 포철의 부사장과 상무라는 사람들이 의원들을 방문해 자기들이 대신 출석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었는데, 그 다음날 노동위에서는 대리 출석을 허용하자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라고 애기했다.

 김의원은 돈봉투 사건이 터진 뒤 처음에는 동료 의원들의 난감한 처지를 생각해 부담을 느끼는 눈치였으나 이제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듯한 모습이다. 김의원이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동료 의원들이었다.

김의원을 증인으로 내세우려 한 동료들
 국회 노동위는 지난 27일 자보의 김덕기 사장, 이창식 전무, 박장광 상무 등을 증인으로 채택해 진상조사를 했다. 그런데 이 날 노동위에 참석한 의원들은 끊임없이 동료 의원인 김의원을 증인으로 세우려고 했다. 민주당 간사인 원혜영 의원과 홍사덕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김의원이 위증을 할 경우 처벌을 받는 증인의 입장에서 돈봉투 건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의원은 “왜 나만 증언대에 세우려고 하느냐. 증언대에 서려면 노동위 의원 모두가 서자”라고 항의했으나 막무가내로 김의원을 증언대 위로 밀어올리려고 했다. 원혜영 의원이 끝까지 반대해 김의원이 증인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노동위 의원들의 행동은 감정이 격앙된 상태임을 감안한다 해도 상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의원이 문제를 제기한 근본 원인이 국회가 증인 불출석과 위증을 묵인한다는 것이었는데, 동료 의원을 증인으로 세우는 데는 번개같이 합심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노동위의 이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증인들도 김의원을 매우 무례하게 대했다.

 김의원이 폭로한 돈봉투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증인 불출석과 위증에 대한 고발이 한창 논의되고 있던 지난해 11월12일 밤 11시께 귀가해 보니 과일 바구니와 쇼핑 백이 있었다. 과일 바구니는 배달된 것이었고, 쇼핑 백은 평소 등산을 같이 다녀 안면이 있던 자보의 박장광 상무가 놓고 간 것이었다. 쇼핑 백을 열어 보니 도장이 여럿 찍힌 누런 봉투가 들어 있었다. 봉투를 뜯어 보니 하얀 봉투가 나왔는데, 그 속에 돈으로 짐작되는 네모꼴 물체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다음날 박상무와 친한 안상기씨(전 포항제철 부설연구소 수석연구원)에게 찾아가 돈봉투를 보여주며, 박상무에게 연락해 ‘당장 찾아가라’는 얘기를 전해 달라고 했다. 박상무에게서 연락이 와 다음날 돈을 돌려보냈다. 돈을 돌려준 3~4일 뒤 박씨와 안씨 그리고 전 노총부위원장이었던 박수근씨와 점심을 함께했다. 박상무는 그 과정에서 세 번이나 “다른 의원은 다 받으시는데 왜 그러시느냐”라고 말했다.

 이 날 증인으로 나온 자보측 관계자들은 모두 김의원의 주장을 부인했다. 특히 박상무는 11월에 김의원 집을 방문한 적이 없으며 12월에 회사측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두 차례 김의원과 점심을 같이했다는 사실도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또 이창식 전무는 “의원님이 날짜와 사건 등을 기억하는 데 있어서 혼돈과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김의원을 아예 노인성치매증 환자 취급을 했다.

“기백만원은 놓고 가더라”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국회나 검찰이 의지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밝혀질 전망이다. 안상기씨와 박수근씨가 이번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증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두 사람은 기자들과 만나기를 피하고 있는데, 김의원은 그들이 모두 자신의 얘기를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국회나 검찰에서 증언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며 사태를 낙관한다.

 한편 민자당과 민주당은 돈봉투 사건이 몰고 올 정치적 파장을 조심스레 점치며 사태를 관망하는 상태다. 민주당의 경우 장석화 위원장이 이기택 대표의 사조직인 통일산하회 간사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당내 주류와 비주류 간에 첨예한 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다. 민자당은 이 사건이 정치권 전체에 대한 사정으로 비화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운다. 사실 다른 물 좋은 상임위에 비하면 노동위에 대한 기업의 로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보통 국정감사 때 기업인을 만나면 “2백만원에서 5백만원은 놓고가더라”고 털어놓는다. 늙은 노동운동가의 분노는 정치권에 스산한 바람을 몰아오고 있다.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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