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58년 개띠냐?”
  • 전상인(편집자문위원·사회학 박사) ()
  • 승인 199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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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세대간 연결자 58년생의 사회학’



‘조직의 쓴맛’에 지치고, '개인의 단맛‘은 못본 세대
 웬만한 규모의 직장에서는 ‘58년 개띠 신드롬’ 혹은 ‘76학번 마피아’라는 말이 흘러 나온다. 대기업에 다니는 샐러리맨의 경우라면 과장을 거쳐 차장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할 나이요, 고급 공무원이라면 이제 서기관급에 진입할 때요, 신문사에 근무한다면 일선 기자로서는 고참이 되어 있을 30대 중·후반 연배들이  조직 생활에서 ‘튄다’는 것이다. 상사들의 눈에는 한심한 신세대의 원조로 치부되면서도, 아래 사람들에게는 청산해야 할 구세대의 유물로 경원 당하는 샌드위치 신세가 가끔씩 ‘잡음’을 내는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58년 개띠를 전후한 연배들의 그럴 만한 사정에 관한 것이다. 광복과 전쟁 세대를 부모로 하여 가난과 부패, 그리고 독재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 말기에 출생신고를 한 그들은,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동기에 젖을 뗐다. 그리고 청소년기는 ‘조국 근대화’의 파고가 이 땅에 밀려오던 때였다. 공장 노동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가운데 생활의 터전은 도시로 옮겨갔으며 대가족은 찢어지고 아파트라는 주거 양식이 선보였다. 그 시절은 또한 개발 독재의 불도저가 민주주의를 갓길로 밀어내면서 군부와 재벌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배 계급을 형성할 무렵이기도 했다.

 60년대 사회 변동의 한복판에서 58년 개띠세대들은 베트남으로 ‘팔려간’ 삼촌과 형님에게 위문 편지를 쓰면서 차세대의 꿈으로 성장했다. 콩나물 교실에서 2부제 수업을 받으며 온갖 입시제도 개혁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 국민교육현장 3백63자를 외우고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하얀 흉패를 까만 교복 왼쪽 가슴에 달고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경제성장 덕분에 아마도 그럴듯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 첫 세대가 아니었나 싶고, 비록 흑백이었을망정  ‘바보 상자’에 비친 대중 문화가 사춘기를 달래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학으로 갔다. 그것은 빠르면 76년이었고, 대부분은 그 다음 해였다.

 대학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죽음의 낭만이었다. 캠퍼스 광장은 ‘짭새’들의 차지였고, 정의와 평화 그리고 애국심은 골목길 하숙방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서슬 퍼런 긴급 조치 9호 앞에서 청년의 패기는 바위를 치는 달걀에 불과했고, 70년대 후반에는 우정조차 귀하고 은밀했다. 바깥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으로 흥청거리는데, 안에서는 다들 사랑에 목말라하고 정에 굶주렸다. 돌이켜 보면, 자가용 타고 학교 다니기 시작하던 ’철없는 선조 신세대들의 데카당스‘나, 야학과 농활에 열중하던 의식 있는 대학생들의 레지스탕스나 대학인으로 선택 받은 청춘을 불행하게 보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대학 생활을 마치거나 마칠 무렵은 80년이었다. 칼만하임의 논지에 따르자면, 80년은 이 땅에서 58년 개띠라는 세대적 ’위치‘가 사회·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세대적 ’단위‘로 비화하는 해였다.

76~79학번에 월급쟁이 많은 까닭
 68년은 미국 현대사를 ‘칼로 자르듯’ 나누었다. 그 해 미국이 기록한 비극적인 사건표는 세대 간의 충돌, 혹은 과거와 미래 간의 전쟁을 상징했다. 전후에 성장한 베이비 붐세대는 ‘서른 살이 넘은 모든 이’를 불신하며 기득권에 저항했다. 68년 1월, 푸에블로호 납치와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는 미국내 파워엘리트의 체면을 여지없이 깎아내렸다. 3월에 열린 뉴햄프셔 주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유진 매카시는 42%의 지지율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 8월 말에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잔치가 아닌 유혈의 난장판이 되었고, 학생들은 1년 내내 캠퍼스 안팎에서 ‘문화혁명’을 꿈꾸었다.

 미국의 68년은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영웅과 우상을 줄지어 잃었다. 4월 초에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된 지 두달이 겨우 지날 무렵 이번에는 로버트 케네디가 쓰러졌다. 그리고 10월에는 재클린 케네디마저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정작 사라진 것은 사람이라기보다 희망과 이상이었다. 환상이 환멸로 변하면서 미국의 새로운 세대는 정치적으로 고아가 되어버렸다. 같은 해, 더스틴 호프만은 ‘졸업’과 동시에 미세스 로빈슨에게 동정을 잃었다. 그것은 기성 세대가 되기 위한 통과 의례이자 현실에 대한 타협이었다.

 세대 구분에 관한 한 한국의 80년은 미국의 68년에 비견될지 모른다. 한국 최현대사에서 희망과 절망이 그 해처럼 극명하게 교차한 적이 있었을까. 79년 여름과 가을, 역사는 기나긴 군부·개발 독재 시대의 종식을 준비했다. 한 시대에 종막을 고하고 새로운 역사가 기지개를 켜던 80년 정초의 최고 덕담은 ‘서울의 봄’이었다. 4월 말에는 강원도 사북에서부터 노동운동이 빗장을 열었고, 5월 중순에는 서울역 광장이 민주화 열기로 달구어졌다. 그것의 일부는 바로 58년 개띠들의 체온이었다.

 그러나 79년 겨울에 잉태한 불길한 예감은 부러진 역사의 날개를 거슬러 주었다. 군부독재의 부활을 예감이라도 한 듯, 80년도 국내 최고 히트 영화는 변장호씨가 감독한 <미워도 다시 한번 80>이었다. 5·17을 분수령으로 하여 모든 것은 끝났다. 피투성이가 된 광주는 곡소리마저 숨겨야 했다. 그 해 8월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을 법했던 ‘양김’은 사형수로 전락하거나 영어의 신세가 되었다. 정치는 얼어붙고 경제는 처음으로 뒷걸음친 가운데 실속 없는 사회 개혁과 정화 운동이 민심을 협박했다. 학교 스승이기도 했던 다수 지식인의 곡학과 아세는 일제 말기의 친일을 연상케 했다.

 4·19 세대가 역사의 승리자로 영광을 안았다면 80년은 시대의 패배자를 낳았다. 기억하는가. 언제부터 이 땅의 대학생들이 일제히 배지를 떼기 시작했는지를. 어둡고도 참혹했던 80년대초, 대학을 떠난 58년 개띠들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세속적 처세와 출세로써 잊으려 했다. 그 전후 연배들에 견주어 70년대 후반 학번들에게 ‘보통 월급쟁이’가 특히 많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소시민이 되기를 포기한 일부는 유학자유화 정책에 편승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10여년 뒤, 고작 그들은 박사들의 대량 실업 사태라는 사회 문제의 주인공으로 세간의 동정과 이해를 구걸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세대 갈등을 온몸으로 체험
 직장 생활에서 58년 개띠 세대의 모습은 어중간하기 짝이 없다. ‘조직의 쓴맛’에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신세대식 ‘개인의 단맛’을 즐길 용기는 엄두일 뿐이다. ‘칼퇴근’하는 젊은 아이들을 서운해하면서도 술자리에서 끝장을 봐야 하는 구세대의 사회적 미덕은 지겨워한다. 뽕짝을 부르면서도 그 어색함을 떨칠 수가 없고, 능력에 벅차기로 말하자면 랩송만이 아니라 발라드풍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컴퓨터에 대해서는 반문맹. 그러다 보니 동병상련하는 자들의 유유상종은 이 땅의 세대 갈등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꼴이 되었다.

 사회적 갈등 구조의 탈계급화가 성급히 논의되는 요즈음, 대중과 개인의 동태적 타협으로써 계급이 아닌 세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오르테가이 가세트를 다시 읽는다. 싫든 좋든 58년 개띠들은 우리 사회의 세대간 교량이다. 설령 강폭은 넓고 교폭은 좁을지언정.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세대를 앞뒤로 두고서 지금 그들은 자신의 성년을 고뇌한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앓는 성장의 아픔인지도 모른다.

 58년 개띠, 혹은 76학번들에게도 작은 자부심은 있다. 끌어주는 선배 흔치 않고, 밀어주는 후배 찾기 어렵던 단절된 시대에 그들은 일찍부터 혼자 크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87년 초여름, 뒤늦게나마 그들은 다운타운의 화이트 칼라로서 민주화 대투쟁에 참여하고 일조했다. 암울한 대학 시절에 겪었던 양심의 갈등을 마침내 성년의 초입에 풀 수 있었던 셈이다.

 다시 개띠 해를 맞아 서른 일곱의 나이를 깨닫는 그들에게 따뜻한 격려 박수를 보내자. 더 간고한 세월을 헤쳐나온 선배 세대들에게 부끄럽기는 하지만, 어차피 지금 우리 사회는 그들 몫의 건투를 건너뛸 수 없기 때문이다.
 全相仁(편집자문위원·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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