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북한에 직접투자도 고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4.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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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문제 잘 풀릴 경우 대비, 아시아협회 권고안 적극검토…에너지 지원 포함

 “외교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에서 외교 정책을 실천하는 외무부장관으로 변신하고 보니 내 책장에 있는 대부분의 국제관계 책들이 핵 이단국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딱 한권 예외가 있었다.” 지난해 12월 하순 韓昇洲 외무부장관이 <뉴욕 타임스> 도쿄 특파원인 데이비드 생어와의 회견에서 한 얘기다. 그가 꼽은 책은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이자 하버드 대학 교수였던 토머스 셸링이 60년대에 쓴《분쟁 전략(The Strategy of Conflict)》. 그는 “북한 핵 문제를 생각하면서 단 하루도 셰링이 책에서 마한 구절들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한 장관이 미국의 유력 신문사의 한반도 핵담당 기자에게 그런 얘기를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부내 대표적 온건론자로 통하는 한 장관은 외교력에 의한 분쟁 해결을 강조한 셸링을 상기시킴으로ㅆ 미국 조야에 한국 정부의 온건 기조를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한예로 셸링은 ‘상대방의 주장에 너무 통제되거나(too controlled), 너무 경직되거나(too disciplined), 너무 민감한(too sensitive) 반응을 보이면 상대방의 존경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파국으로 치닫던 북한 핵 문제가 일단 위기 국면을 벗어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셸링의 외교 철학을 믿고 이를 실천한 한 장관의 외교력 덕분이었다. 궁지에 몰린 북한을 무조건 밀어붙이기보다는 퇴로를 열어주면서 접근한 그의 방식이 주효했다는 지적이다. 미국 외교의 사령탑인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 정부가 선호하는 북한 핵 해결 방식은 대화다”라고 천명했다. 최근 북한 핵을 둘러싼 정세의 흐름은 유엔 제재와 같은 강경수단이 아닌 협상에 의한 외교 수단이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미 외교 사령탑 모두가 외교력에 의한 분쟁 해결에 비중을 둔 것이 잘 못되지 않았음을 반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1년 동안 한반도 주변의 위기 상황을 몰고왔던 북한 핵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돼온 미국과 북한,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간의 핵 담판은 확고한 사찰 이행과 미·북한 관계 개선을 위한 예비 회담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한 미국외교관이 “지금까지의 회담은 절차상의 문제를 마무리 짖기 위한 회담이었다”라고 지적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미·북한 앞으로 6개월간 신경전 벌일 것”
 전문가들은 앞으로 6개월 동안 미국과 북한이 서로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벌일 것으로 본다. 특히 올 연말부터 미국에서는 오는 96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서서히 선거 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된다. 그 때문에 또다시 북한 핵 문제가 지지부진하고 미국 언론이 강경책을 주장할 경우 재선을 의식한 클린턴 대통령이 강경 수단을 택할 수도 있다. 클린턴대통령도 북한 핵을 올 연말 이전에 해결돼야하는 ‘정치적 마감 시간’을 맞은 셈이다.

 현재의 상황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위협하던 지난해 3월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것은 없어도,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29일 뉴욕에서 미국과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핵사찰 수용-남북 특사교환△팀스프리트 훈련중단-3단계 미·북한 회담 개최라는 ‘소 일관안(small package)’을 합의한 만큼 앞으로 회담은 그 연장선상에서 양측 주요 관심사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미·북한 3단계 회담이 예정대로 열리면 미국은 북한에 대해 아직 국제원자력기구에 신고하지 않은 두 핵시설에 대한 사찰 문제를 집중 거론할 방침이다. 반면에 북한은 경수로 기술 이전과 같은 경제혁력 방안과 체제 보장을 의미할 국교 수립 문제를 주요 의제로 꺼낼 것으로 보인다. 3단계 회담에서 양측이 노리는 속셈은 이처럼 다르다. 특히 북한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신고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정부는 앞으로 북한이 핵 의혹을 완전히 해소할 경우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한 정통한 정통한 서방 소식통은 “미국 정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줄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정부는 6·25 전쟁 발발 3일 후인 50년 6월 28일 북한에 대한 금수 조처를 발효시킨 뒤 미국내 북한 자산 동결(50년 12월), 최혜국 수혜대상 제외(51년 9월), 대외지원 금지 대상국에 북한 포함(62년 10월), 미국 수출입은행 차관 공여 금지(86년 10월) 등 일련의 규제 조처를 취해 왔다. 그 때문에 북한과의 교역이나 각종 교류 협력을 가로막고 있는 규제 법안이 20여 개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국무부는 북한과의 협상이 원만히 진행될 경우에 대비해 단기적인 경제 지원 방안을 내밀히 검토해 왔다.

 이와 관련해 얼마전 뉴욕에 본부를 둔 아시아협회가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 방안을 상술한 권고안을 국무부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끈다. 이 권고안은 아시아 협회가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5개국 1백50명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에게 설문 조사해 나온 것으로 북한의 경제 회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재미 핵전문가인 피터 헤이즈 박사는 기자와의 국제 통화에서“미 국무부가 북한 지원책의 한 방안으로 이권고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시사저널》이 처음으로 공개하는 아시하협회의 권고안은 북한에 대한 지원방식이 단기적으로는 대규모가 아닌 소규모 형태가 돼야 할 것으로 지적했다. 그 이유로 △북한의 경제현황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부족하며△외국인의 투자를 끌어들일 만한 법적 장치가 결여돼 있고 △대외부채 50억달러를 안고 있는 북한의 상환능력에 문제가 있으며 △투자를 북돋울 만한 사회간접자본이 결여돼 있다는 점을 꼽고 있다.

환경문제 등 비정치분야부터 협력
 3단계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으로부터 단기적으로 (6개월~1년내) 미국정부가 취할 수 있는 경제 협력 조처에는 무엇이 있을까. 권고안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우선 대북한 전화 업무에 대한 규제를 풀도록 권하고 있다. 그럴 경우 AT&T같은 초대형 통신업체들이 북한에 진출할 길이 트인다. 또 현재 북한이 가입 신청을 해놓고 있는 아시아개발은행이나 세계은행을 포함한 국제적인 금융 기관에 자유로이 가입할 수 있게끔 해주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미 의회는 적성국과의 교역금지법을 수정하거나 완화해 미국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는 것을 허용하되 초기에는 광업 부문과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역점을 두게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평양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 유엔개발(UNDP)이 주관하는 두만강개발계획을 통하거나 아니면 나진·선봉 등과 같은 자유무역지대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도 검토되고 있다. 특히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가 지원하는 각종 원조 활동에 북한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권고안을 차질 없이 실천하려면 한가지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 공산권에 첨단 기술 수출을 금하고 있는 코콤(대공산권수출통제조종위원회·COCOM)의 제한 규정이 그것이다. 냉전 시대의 산물인 코콤은 오는 3월말 해체되고 대신 이데올로기 성격을 배제한 새 기구가 등장한다. 그런데 새 기구는 이란 이라크 리비아 북한 등 ‘위험국’으로 분류된 나라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해 이들 나라로 첨단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제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때문에 미국 정부는 우선은 자기 나라 기업들이 코콤 또는 대체 기구의 제한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도 북한에 진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약품이나 식료품 같은 인도적 원조나 쌀 개량에 관한 유전공학 연구, 환경문제와 같은 비정치 분야부터 북한과 협력할 방안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현재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에너지 부문이다. 헤어즈 박사가 최근 북한 소식통으로부터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얼마전 설날을 전후해 평양 일원에 정전소동이 일어났을 정도로 북한의 전력난이 갈수록 심각한다고 한다. 다른지역에 비해 정전 사고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진 평양은 지난해 10월에도 정전 소동을 빚었다. 미 국무부는 에너지 부문에 대한 지원책도 마련해 놓고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우선 유엔개발계획을 통해 평양 이원에 전력을 원활히 공급할 수 있게 배전 시설을 개선한다는 것이다. 또 갈수록 노후돼 가는 송전 및 배전 설비들을 개선하고 필요하다면 부품을 공급할 것도 고려중이다. 그밖에도 전력용 석탄의 열효율을 높일 시설을 건설하는 문제도 검토 대상이다.

경수로 지원은 단기간내 어려울 듯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농톤 지역에 전력을 원할히 공급할 수 있도록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지원할 것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검토안은 생물 가스(미생물의 작용으로 유기 폐기물에서 생기는 메탄과 이산화탄소의 혼합기)또는 태양 온수 같은 ‘재생용 에너지’를 활용하는 방안이다. 북한의 풍부한 석탄, 특히 저등급 석탄에서 효율 높은 열과 증기를 뽑아내는 데 필요한 유동상(流動床) 연소기술을 응용한 시범 공장을 짓는 문제도 또 다른 검토 대상이다. 미국정부는 이처럼 다양한 기술 지원을 통해 북한으로 하여금 전력 공급 계획을 정확히 가려내 과학적인 전력 전쟁을 짜도록 도와준다는 방침이다. 이같은 각종 에너지 지원 계획들에 소요되는 비용은 적게는 건당 5백만달러(약 40억원)에서 많게는 1천만달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어떤 계획은 단기간에 실행될 수 있는 반면 어떤 계획은 단기간에 실행될 수 있는 반면 어떤 계획은 입안에서 실행까지 수년이 걸리는 것도 있다.

 다만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경수로 지원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은 대남담당 고위 실무자인 김용순이 “경수로 지원 문제만 해결되면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 남을 것”이라고 공언할 만큼 경수로 문제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보유한 원자로는 흑연감속형 원자로로, 이는 미국과 한국이 보유한 경수로에 비해 군사 목적으로 전용하기가 쉽다. 미국 정부는 GW(기가와트·10억W)급 원자로 1기를 건설하는데 30억달러가 소요되며, 건설 기간도 평균 6년이나 된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

 미·북한 간의 경제 협력은 현재로선 언제 어떻게 실현될지 미리 짚어보기가 어렵다. 경제 협력이든 관계 개선이든 북한이 핵 의혹해소라는 당면 ‘정치현안’을 풀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은 북한쪽 코트에 넘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 국무부가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대비해 이 정도로 당근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점은, 현재 진행중인 북한 핵 협상 기류와 관련해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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